백화점의 공간혁신 경영학

유통업계를 십수년 호령하던 백화점이 위기를 맞은 건 오래전 일이다. 몇년 전엔 마트에 밀리더니, 이젠 온라인에 기는 신세가 됐다. 손가락만 돌리면 원하는 물품을 살 수 있는 소비자들은 ‘오프라인 매장’으로 향하던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이런 백화점이 택한 생존 전략은 흥미롭게도 매장을 비우는 것이다. 매장을 더 채워도 시원찮을 판에 매장을 빼고 있다는 얘기다. 이 전략, 과연 통할까. 더스쿠프(The SCOOP)가 백화점의 「공간혁신 경영학」을 취재했다. 

소비자들은 이제 쇼핑 대신 ‘즐기기 위해’ 백화점을 찾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소비자들은 이제 쇼핑 대신 ‘즐기기 위해’ 백화점을 찾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 8일 오후 3시. 서울 삼성역 앞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을 찾았다. 스타필드와 이어지는 거대한 건물이 도심 복판에 우뚝 서있다. 평일 낮에 온 탓인지, 백화점 내부는 한산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씩 올랐다. 층마다 상하행 두대씩, 에스컬레이터 네대가 나란히 있지만 빽빽하긴커녕 널찍하게 느껴졌다.

에스컬레이터 사이엔 세련된 탁자와 의자가 있다. 소품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가격표가 붙어있다. 다른 층도 마찬가지다. 신상 캔버스백 몇개만 덩그러니 있을 뿐, 판매 직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니 맞은편 아기자기한 생활용품점이 눈에 띈다.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다가갔다. 매장은 에스컬레이터에서 9~10걸음 남짓 떨어져있다. 기분 탓일까, 제법 멀게 느껴진다. 

# 현대백화점을 나와 고속터미널 옆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으로 이동했다. 이곳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노란 조명은 갤러리 같은 느낌을 준다. 층별로 에스컬레이터 옆에 소파가 서너개씩 배치돼 있다. 손에 커피잔이나 쇼핑백을 든 고객들이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남성복 매장으로 올라갔다. 휑하다 싶을 정도로 넓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 안쪽엔 의류 매장이 아닌 카페가 들어섰다. 한적한 남성복 매장과 달리 카페 안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쇼핑보다 휴식을 즐기는 이들이다. 매장 대신 들어선 휴식 공간을 고객들이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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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의 지각변동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오프라인 유통업체의 매출 비중은 2015년 69.8%에서 지난해 62.1%로 줄었다. 오프라인 채널 중에서도 ‘전통 강자’ 백화점의 감소세는 유난히 가파르다. 2016년 5월 25.2%였던 매출 비중은 지난 5월 17.7%로 무려 7.5%포인트나 감소했다. 전체 업태 중 20%의 비중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거다.

위기에 놓인 백화점이 택한 생존전략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우기’다. 매대를 빼고, 영업면적을 줄였다. 백화점 업계의 한 관계자는 “평당 매출을 의미하는 ‘평효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옛날 얘기”라며 “지금은 사람들이 일부러 매장을 찾아올 만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구매로 인한 직접매출보다 ‘집객 효과’로 발생하는 간접매출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백화점의 새 전략 ‘비우기’ 

이 때문인지 백화점 매장에 여유 공간이 늘어나는 건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과거엔 에스컬레이터 양옆에서 스카프·양산 등 잡화 할인 매대를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쇼핑할 때 동선을 방해하는 할인 매대는 눈에 띌 만큼 사라졌다. 매장의 통로도 넓어져 두세명이 함께 다녀도 불편하지 않다. 

A백화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소형 점포의 경우 일반적으로 할인 매대는 한층에 1~2개, 대형 점포는 4~6개 설치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줄어든 거다. 물론 재고 정리를 할 수 있는 할인 매대를 줄이면 그만큼 매출도 빠진다. 그러나 지금은 매대를 통한 매출보다 고객이 기분 좋게 쇼핑하는 게 더 중요하다. 고객도 북적이는 매장보다 쾌적한 매장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B백화점 관계자도 “예전처럼 할인 매대를 층마다 배치하는 건 지양하고 있다”며 “이벤트홀 등 최대한 한곳에 몰아두고, 나머지 매장은 여유롭게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빈자리를 마냥 방치하는 건 아니다. 백화점 업계는 각종 전시·팝업스토어 론칭에 공들이고 있다. 예컨대, 롯데백화점 김포공항점은 지난 6월 28일 아시아 최초로 쥬라기월드 특별전을 선보였다. 거대한 로봇 공룡을 들일 넓은 공간(실면적 1980㎡·약 600평)을 확보하기 위해 백화점 측은 선글라스·스카프 등 일부 매장을 뺐다. 알짜 매장을 지키는 대신 테마파크 유치를 택한 셈이다.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은 9층 전체를 아쿠아리움(연면적 5289㎡·약 1600평) 등 테마파크로 만들었다. 현대백화점 판교점도 처음 지을 때부터 5층에 어린이 책 미술관(연면적 2736㎡·약 830평)을 설치했다. 이들 아쿠아리움, 어린이 책 미술관은 지역의 대표 문화시설로 자리잡았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2736㎡면 결코 좁은 공간이 아니다”면서 “이 정도 규모의 공간은 영업을 시작한 후에는 설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설계 단계에서 구상한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도 “영화관·아쿠아리움 같은 공간은 한번 지으면 매장으로 재활용할 수 없는 시설”이라며 “그런데도 영업 공간으로 쓰는 대신 영화관을 들이는 백화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물건을 팔아야 할 백화점이 되레 매대를 빼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간을 혁신해 소비자에게 ‘오고 싶은 공간’과 ‘기억에 남는 경험’을 선물하겠다는 거다. 김영호 김앤커머스 대표는 “이제는 쇼핑하러 백화점을 찾는 사람이 드물다”며 “쉬거나, 먹거나,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고급문화를 체험하러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백화점이 공간 혁신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매장 전체 면적 중에서 매대를 뺀, 소비자를 위한 편의 공간을 ‘어메니티(amenity) 공간’이라고 부른다.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공간을 넓혀왔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품격 있는 소비 또는 쾌적한 소비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백화점의 어메니티 공간 확장은 프리미엄 채널이라는 이미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백화점의 생존 전략은 크게 두가지다. 주요 매출은 명품·해외브랜드에서 내고, 나머지(어메니티 공간)를 고급문화 공간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일단 소비자의 발길을 끌면 조금이라도 매출로 이어진다는 거다. 한 대형백화점 관계자도 “쉼터 조성이나 전시회 론칭은 당연히 투자비가 많이 드는데다, 매출을 직접적으로 올려주진 않는다”면서도 “다만 온 김에 식품관에서 밥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면, 딱히 쇼핑할 생각이 없던 사람조차 뭐라도 하나 사게 된다”고 말했다. 

차별성 잃을 수 있어

하지만 백화점의 ‘공간혁신’ 전략이 얼마만큼의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온라인의 기세가 너무 뜨겁다. ‘공간경영’을 이미 선보인 대형마트나 대형몰의 실적도 신통치 않다. 지난해 대형마트 3사의 영업이익은 전부 급감했다. [※참고: 이마트 할인점  5975억원(2017년) → 4397억원(2018년), 롯데마트 1조5190억원 → 1조2630억원, 홈플러스홀딩스 2572억원 → 1091억원]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백화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비우기’ 전략을 꾀하면 차별성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김영호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국내에는 지역 백화점이 대부분 사라졌다. 소위 빅3(롯데백화점·신세계백화점·현대백화점)로 불리는 대형백화점이 인수했기 때문이다. 점점 3사 중 한곳이 뭔가를 하면 나머지도 따라하는 식이다. 백화점들의 색깔이 전반적으로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는 이마저도 소비자가 진부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심지영 더스쿠프 기자 jeeyeong.shi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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