쉘 위 아트 | 구상화가 이희명(Lee-Hee Myoung)

The Messenger, 260×194㎝, 캔버스 위에 과슈, 아크릴, 2019-2020
The Messenger, 260×194㎝, 캔버스 위에 과슈, 아크릴, 2019-2020

문득 어느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때론 페인팅에 기반한 구상회화가 비구상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 형태로 메시지와 뜻을 전달하기에 더욱 어려움이 느껴지는 것 같다. 관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뉴미디어아트·AR·VR·메타버스 등 기술이 발전하는 시기엔 회화적 표현이 더욱 쉽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에 주는 가치를 갖고 있는 페인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변화를 거듭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모든 건 변화하면서도 궁극적으론 또 결합한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희명 작가는 지금처럼 완전한 디지털화를 향하는 시대에 회화작가로서 보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작가로서 고찰을 통한 지혜를 표현함과 동시에 전시를 기획하는 데서도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이 다양할 것이기에 첨언을 하자면 기존 전시들, 특히 페인팅의 경우 정적인 전시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닿게 만들것인가” “어떻게 하면 미술계와 평단에서 봐도 전시가 정말 좋았다고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찬사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떤 평론가 선생님에게 글을 받아서 도록에 실을 것인가” 등등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독특한 평을 얻을 수 있는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회를 기획할 때 전시공간으로 예정한 삼청동 아트비트갤러리의 구조를 기반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갤러리 공간도 예술작품을 담는 또하나의 오브제로 삼은 셈이다. 미술계에서 아트비트갤러리는 전시적인 면과 함께 공간적인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곳이기 때문에 좋은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아트비트갤러리는 가정집을 개조한 디자인으로, 각각의 방을 터서 만든 2층 구조로 돼있다. 나는 이 점에 착안해 이번 개인전의 주제 ‘우연의 방’을 기획했다. 현실의 망망대해 앞에 홀로 선 자아가 마주하는 고민을,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마주하는 조율과 응시의 방으로 다뤄보고자 했다. 각각의 방을 만남의 방, 생각의 방, 생산자(창작자)의 방, 외톨이의 방, 정물의 방 등 5개의 소주제로 분류해 내적 다층성의 표상을 구성했다.”

Face To Face, 130×130㎝, 캔버스 위에 과슈, 아크릴, 2020
Face To Face, 130×130㎝, 캔버스 위에 과슈, 아크릴, 2020

현실계의 거울인 지구와 원초성으로 대변되는 식물이 조우하는 방(만남의 방), 달과 지구, 식물과의 조합으로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하는 방(생각의 방), 생산·창작 행위의 사색과 유희의 방(창작자의 방), 심적 침잠의 시공간과 고독의 방(외톨이의 방), 정물을 통해 자아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방(정물의 방)으로 나눠 회화와 설치 등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내면의 스펙트럼을 표면화했다. 

각 방에는 지구·달·식물과 자화상이 공통적으로 나와 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지구는 진리로부터 표현된 세계를 의미한다. 달은 니체의 초인과 같이 초월적인 존재를 상징한다. 식물은 지구라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원초적인 생명을 표현한 것이고, 자화상은 달과 함께 개인적인 삶에서 초월한 관찰자적 입장에서의 관점이다. 

이런 구성원들이 각 방의 테마에 따라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성장하며 때론 고민하고 고독해한다. 한편으론 자신에게 씌워진 한계를 열어젖히고(Open Your Cap, 2020), 사람들끼리 얼굴을 맞대며 삶의 에너지를 피워나간다(Face To Face, 2020). 그렇게 형태를 갖춘 존재들과의 관계들이 아닌 절대자와 같은 무형의 존재와도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철탑 위에서 뻗어나온 손으로 만들어진 흔적과 영감을 통해 메시지를 받아 적고 있는 작가의 자화상도 나오고, 그런 작가를 지켜보는 진리의 눈들도 보인다. 

많은 작가는 “화가는 영매와 같아서 그분이 오시기 전에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곤 하는데, 딱 그 부분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화가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예술인과 영감을 기반으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이 가장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inspiration, 2019-2020). 

Dreamer Face, 40×40㎝, 종이(나무판넬) 위에 과슈, 아크릴, 2020-2021
Dreamer Face, 40×40㎝, 종이(나무판넬) 위에 과슈, 아크릴, 2020-2021

지쳐보이는 작가를 붙잡는 의자에서 뻗어나온 손들이 자연으로 나오는 메시지를 쳐다보는 걸로 봐서 영감을 잡아서 작품화하는 작가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The Messenger,  2019-2020). 꿈을 꾸고 창조를 해나가는 드리머에게는 다채로움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Dreamer Face, 2020-2021).  이 모든 작품에서 아트비트갤러리와 같은 공간적인 벽면들이 작품세계 내내 배경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흥미롭다. 

형상화한 이미지와 메시지가 서로 포개어져 있기도 하고 서로 융합해가면서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형태, 동시에 비약 없이 부담을 주지 않는 시각적인 의미들은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작가는 말한다. “회화에 소중한 의의가 있는 이유는 회화 자체가 작가만을 위한 예술, 시대착오적인 예술의 허세에서 벗어나 관객들과 작품 자체로 대화하려는 순결한 의지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열정과 시간의 지층으로 만들어진 이번 전시가 누군가에게 마음의 지평선이 될 수 있는, 내가 선택한 언어의 질감보다, 의도하지 않은 탄성과도 같은 순수한 메아리가 되길 염원한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깊은 사유를 하며 얻은 지혜를 모든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작가의 따뜻한 염원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세계적 팬데믹 이후의 세상을 걱정하는 불안한 마음에 평안을 안겨주는 지평선을 이희명 작가의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6월 22일 막을 내린 이 전시의 작품들은 아트비트갤러리의 웹사이트에서 고화질 이미지로 감상할 수 있다. 온라인을 통해서 이희명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길 권한다. 

김선곤 미술전문기자
sungon-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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