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주권 없는 복합적 이유

“글로벌 백신 생산 허브의 한축을 맡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글로벌 바이오 콘퍼런스에서 밝힌 포부다. 정부는 수년째 국내 제약바이오산업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의 위상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19라는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 때보다 제약바이오산업이 주목받는 시기지만 한국은 백신도, 완전한 치료제도 만들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정부 탓일까. 

2020년 4월부터 국산 백신·치료제 개발이 진행됐지만 결실을 맺기까지는 갈길이 멀다. [사진=연합뉴스]
2020년 4월부터 국산 백신·치료제 개발이 진행됐지만 결실을 맺기까지는 갈길이 멀다. [사진=연합뉴스]

정부가 제약바이오산업을 키우겠다고 나선 지 수년째다. 2017년 100대 국정과제에 미래형 신산업으로 바이오산업을 포함한 뒤로 매해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3일 열린 ‘2021 글로벌 바이오 콘퍼런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글로벌 백신 생산 허브의 한축을 맡아 신종 감염병 대응에 앞장서겠다”며 “산(산업계)·학(학계)·연(연구기관) 협업 체계를 구축하면 바이오의약품 산업은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문 대통령의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코로나19가 2년째 이어지는 데 백신 수급은 원활하지 않고, 국산 백신 개발은 요원해서다. 코로나19 백신 임상 시험 단계에 들어선 국내 업체는 9곳(국제백신연구소·SK바이오사이언스·유바이오로직스·HK이노엔·제넥신·진원생명과학·셀리드·큐라티스·아이진)인데, 이중 SK바이오사이언스의 백신(GBP510)만이 임상 3상에 진입했다.

상용화는 일러야 2022년 상반기에 가능할 것으로 점쳐진다. 국민 대다수가 1차 접종은 완료했을 시기다. 

코로나19 치료제도 마찬가지다. 국산 치료제 중 식약처의 허가를 받은 건 셀트리온의 ‘렉키로나주(성분 레그단비맙)’가 유일하다. 렉키로나주는 지난 2월 식약처로부터 ‘조건부 허가(고위험군 경증에서 중등증 환자의 임상 증상 개선 시 투여)’를 받았는데, 그마저도 수차례 효능 논란을 일으켰다. 

정부가 5년째 바이오산업을 집중 육성하는데도 정작 필요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한편에선 정부의 대응이 한발 늦었고,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필요한 예산도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지적한다. 백신주권을 확보하지 못한 데엔 정부의 탓도 있다는 건데, 과연 그럴까. 

 

먼저 대응 속도부터 살펴보자. 2020년 3월 백신 개발 논의를 시작한 미국은 2개월 만인 5월 초단기 백신 개발 작전인 ‘Opera tion Warp Speed(OWS)’를 실행했다. 정부기관과 제약사가 협업해 개발·임상·생산을 동시에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미국은 OWS로 6개 제약사를 선정해 1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했다.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등의 백신계약도 발 빠르게 진행했다. 백신을 남길 만큼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한국은 어땠을까. 사실 한국이 백신 개발에 뛰어든 시기는 그리 늦지 않았다. 2020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산·학·연·병 합동회의’에서 백신·치료제 개발을 지시한 것을 시작으로 범정부 지원단을 꾸려 개발을 추진해 왔다.

당시 정부는 ‘2020년 국산 치료제 확보, 2021년 국산 백신 확보, 2022년 방역 기기 경쟁력 확보’라는 청사진을 그렸다. ▲혈장치료제 개발 지원 ▲기업 애로사항 원스톱 해결 ▲규제완화 ▲R&D 자금 맞춤 지원 ▲신속심의체계 구축 등의 지원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도 2020년 5월부터였다. “기술력은 충분하다”며 국산 백신·치료제 개발에 금방 성공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믿은 게 정부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럼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투입한 예산은 어떨까. 정부는 코로나19 백신·치료제 ‘임상지원’을 위해 2020~2022년 총 4127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2020년엔 940억원(바이오·의료기술 개발비 175억원 별도), 2021년엔 2294억원(본예산 1314억원+추경 980억원), 2022년엔 893억원이 배정됐다. 올해 예산은 백신 임상 3상 비용으로 지원된다. 

제약사에 투자한 백신 개발 비용만 8조원이 넘는 미국과는 여러모로 비교가 어렵지만, 다른 백신 개발 국가인 영국·일본·독일의 경우는 참고할 만하다. 영국은 아스트라제네카사에만 개발 초기 자금으로 3050만 파운드(약 493억원)를 지원했다.

 

일본은 코로나19 관련 R&D를 하는 일본의료연구개발기구(AMED)에 예산을 집중했는데, AMED는 2020년 3차 추경까지 백신 개발 비용에 602억5000만엔(약 6437억원)을 집행했다.

독일 연방교육연구부(BMBF)는 미국 화이자사와 백신을 공동으로 개발한 바이오엔테크사에 한화로 5000억원이 넘는 비용을 지원해 왔다. 이들 국가와 비교해보면 금액의 차이보단 지원 시기와 집중도의 차이가 컸다는 얘기다. 

이른바 ‘팬데믹’급 사태가 터지면 많은 이들이 ‘정부 실패’를 꼬집는다. 늑장대처, 예산부족 등은 때마다 나오는 단골 볼멘소리다.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불가측不可側한 상황에서 기인한 문제점을 ‘정부 실패’에서만 찾으면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국가나 사회에 깔려 있는 고질적 문제들을 놓칠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백신주권을 여태 확보하지 못한 까닭은 뭘까. 이유는 복합적이다. 무엇보다 신약개발보단 해외제품의 제네릭(복제약) 판매에 치중해온 제약바이오 업계의 사업방식이 코로나19 국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들이 코로나19로 수혜를 입으면서 몸값을 끌어올리는 덴 성공했지만 정작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더딘 건 따져봐야 할 문제다. 돈벌이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제약’이란 전공 분야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제약사들이 개발에 힘쓰지 못하는 배경에는 오래전부터 지적받아온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의 ‘허약한 기초연구’ 문제가 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복제약 생산과 판매에 주력하는 우리나라는 기초연구 투자가 전혀 없는 상태”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힘을 쏟는다고 해도 더딜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형식적 관료주의’가 코로나19 백신·치료제 개발 속도를 늦췄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코로나19 백신 임상지원을 받는 절차를 까다롭게 규정한 건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올해 총 3차(1월·3월·5월)에 걸쳐 국산 백신·치료제 개발 임상지원을 모집했다.

1차와 2차에서 각각 6개, 3개 기업이 지원했지만 모두 탈락했고, 3차에선 10개 기업 중 2개 기업(HK이노엔·큐라티스)이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이 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1314억원이었지만 3차까지 진행되는 동안 지원된 금액은 59억원에 불과했다.

공모에서 탈락한 업체의 한 관계자는 “임상시험계획승인신청(IND) 심사에서 미국보다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할 때도 있다”며 “기업 입장에선 자료를 준비하느라 시간과 비용이 더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탈락 업체 관계자는 “선정평가(발표평가→현장실사→투자심의)에서 단계별로 전문가 등 ‘평가위원’의 의견이 반영된다”며 “그들도 결국 업계 사람인데 정말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부 문제든 업계 문제든 한두 가지 변수 때문에 국가 정책이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원인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해결책’도 다양한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만큼 백신 개발 지원금을 주지 않아서…’ ‘정부 대응이 늦어서…’ ‘제약바이오 업체들이 신약을 개발하지 못해서…’ 등의 이유는 단편적이다. 백신주권을 찾는 길은 ‘관점’을 넓히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심지영 더스쿠프 기자
jeeyeong.shi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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