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FP 배터리 채택 늘리기로 한 테슬라
전기차 주행거리보다 가격·안전성 초점
삼원계 배터리 주력한 국내 배터리 3사
각기 다른 전략 내세우며 시장 ‘안갯속’

시장 참여자의 관점이 바뀌면 경쟁 패러다임도 바뀐다. 지금 배터리 시장이 꼭 그렇다. 배터리를 주문하는 완성차 기업들의 태세 전환에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주행거리가 중요하다기에 에너지양이 많은 소재로 배터리를 만들어 공급했더니 이젠 가격과 안전성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어서다. 배터리 전쟁 2라운드, 이젠 ‘소재’ 싸움이다.

완성차 기업들이 LFP 배터리 비중을 늘리겠다고 밝히면서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사진=테슬라 제공]
완성차 기업들이 LFP 배터리 비중을 늘리겠다고 밝히면서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사진=테슬라 제공]

각, 원통, 파우치…. 암호처럼 보이는 이 단어들은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상징하는 세가지 키워드다. 각은 네모난 사각형, 원통은 밑동이 둥그런 기둥, 파우치는 주머니를 뜻한다. 이들을 나열해놓고 보니 한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모두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거다.

맞다. 지금까지 배터리 업계는 모양에 천착했다. 배터리 모양에 따라 성능도, 가격도 달라서다. 경우의 수가 다양하다 보니 고객(완성차 기업)의 입맛도 천차만별이었다. 내구성이 좋고 제작비용이 저렴한 원통형을 찾는 곳이 있는가 하면, 효율이 높고 변형이 쉬운 파우치형을 택하는 곳도 있었다. 자본과 생산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배터리 제조사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의 낙점을 받기 위한 ‘폼팩터(형태) 전쟁’이 일어난 배경이다.  

그런데 최근 이 전쟁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 ‘모양’이 아닌 ‘소재’ 쪽으로다. 변화의 시발점은 전기차 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테슬라다. 테슬라는 지난 10월 21일 리튬 · 인산 · 철(LFP · LiFePO4)로 만든 배터리의 비중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테슬라가 출시하는 모든 차종의 스탠다드(보급형) 모델에 LFP 배터리를 탑재하겠다는 거다. 그동안 배터리 시장의 주류는 니켈 · 코발트 · 망간(NCM · NiCoMn) 등으로 만든 삼원계(세 가지 종류의 비철금속) 배터리였다.

테슬라의 발표 이후 폭스바겐 · 포드 · 메르세데스-벤츠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 역시 LFP 배터리의 비중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고객사의 니즈가 급변하니 배터리 제조사들이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LFP 배터리의 주도권을 쥔 중국 제조사와 달리 삼원계 배터리에 주력했던 국내 배터리 3사(삼성SDI · LG에너지솔루션 · SK온)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배터리 모양을 둘러싼 경쟁이 1차전이었다면 이제는 ‘소재’를 중심으로 한 2차 전쟁이 발발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가 확대되고 있는 만큼 소비자들은 가격이 비싼 프리미엄급(1회 충전 시 주행거리 500㎞ 이상) 차종 대신 적당한 주행거리의 ‘가성비 높은’ 모델로 전기차에 입문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현시점에서 완성차 기업들의 최대 과제는 같은 주행거리라면 더 저렴한, 같은 값이라면 더 안전한 전기차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LFP 배터리 ‘하느냐 마느냐’

바로 이 지점에서 LFP 배터리와 삼원계 배터리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LFP 배터리는 주행거리가 아직 짧다. 주요 소재인 리튬 · 인산 · 철이 갖는 에너지 용량이 작아서다. 대신 LFP 배터리는 삼원계 배터리에 비해 전도성이 낮아서 화재 위험성도 상대적으로 덜하다.

삼원계 배터리의 주요 소재인 니켈은 외부 환경에 쉽게 반응하고 코발트는 산소와 반응할 경우 ‘열 안전성’을 깨뜨려 화재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가격 경쟁력에서도 LFP 배터리가 삼원계 배터리를 앞선다. 지난 9월 기준 LFP 배터리의 재료비는 1㎏당 1만1258원으로 삼원계인 NCM 622(니켈 60% · 코발트 20% · 망간 20% 조합) 배터리(3만6952원)의 30% 수준에 불과했다.

전기차를 만드는 완성차 기업들의 주안점이 주행거리에서 가격·안전성으로 옮겨가며 배터리 소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전기차를 만드는 완성차 기업들의 주안점이 주행거리에서 가격·안전성으로 옮겨가며 배터리 소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여기까지만 보면 국내 배터리 3사가 LFP 배터리를 생산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생산비는 비교적 낮은데 수요는 늘고 있어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장의 변화를 대하는 국내 배터리사의 태도는 제각각이다.

LFP 배터리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곳(삼성SDI)이 있는 반면 이미 양산 기술을 확보해 언제든 LFP 배터리 생산에 돌입할 수 있다는 곳(LG엔솔)이 있다. 연구 · 개발(R&D)은 하되 LFP 배터리를 출시할지는 상황을 지켜본 다음 판단하겠다는 곳(SK온)도 있다. 


배터리사마다 입장이 다른 까닭은 각사가 보유한 기술이 다르고 그에 따라 시장을 보는 관점도 달라서다. 삼성SDI는 삼원계 소재 중 하나인 니켈의 비중을 대폭 늘린 ‘하이니켈’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SDI 관계자는 “현재 프리미엄급 전기차 시장을 주안점에 두고 최신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면서 “LFP 배터리의 용도는 저가형 전기차에 국한할 것으로 예상하는 만큼 향후 삼성SDI가 개발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지난 상반기 배터리 화재사고를 겪은 LG엔솔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LG엔솔 관계자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측면에서 LFP 배터리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면서 “이미 LFP 배터리를 양산한 경험이 있는 만큼 고객사의 수요가 충분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LFP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LG엔솔은 “전기차보다 에너지 용량의 기준이 낮은 ESS(에너지저장장치)에 먼저 LFP 배터리를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안갯속 빠진 국내 배터리사

LFP 배터리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진 SK온은 배터리 개발과 생산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SK온 관계자는 “출퇴근 등 근거리용 전기차 시장을 염두에 두고 LFP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LFP 배터리의 시장성 · 수익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경우 양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국내 배터리 3사는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누구의 판단이 들어맞을지 알 수 없다. 다만 국내 제조사들이 지금 ‘시장의 확장(LFP 배터리 생산)’과 ‘전략적 특화(삼원계 배터리에 집중)’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테슬라발發 나비효과는 국내 배터리 업계를 안갯속에 빠뜨렸다. 안개가 걷히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heartbri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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