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자립은 비용 문제
전기차 업계의 패권경쟁
사업에 변심 운운하기엔

“전기차 시대엔 배터리 업체들이 완성차 업체들 위에서 군림할지 모른다. 완성차 업체가 새 배터리를 개발하고 싶어도 단기간엔 쉽지 않아서다.” 배터리 업계가 전기차 시장의 주류로 떠올랐을 때 완성차 업계는 긴장했다. 수백년 지켜온 ‘자동차 기득권’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하지만 완성차 업계는 죽지 않았다. 배터리 자립화를 꾀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한다. 배터리 자립화를 내건 폭스바겐의 선택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폭스바겐 선택에 숨은 함의를 취재했다. 

폭스바겐이 배터리 자급 계획을 밝히자 배터리 업계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은 토마스 슈말 폭스바겐 기술 담당 이사.[사진=뉴시스]
폭스바겐이 배터리 자급 계획을 밝히자 배터리 업계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은 토마스 슈말 폭스바겐 기술 담당 이사.[사진=뉴시스]

“전기차 배터리셀을 직접 개발해 2023년부터 우리 전기차에 적용하겠다.” 지난 3월 15일 폭스바겐이 ‘파워데이(전기차 사업 전략방향 공개 행사)’에서 밝힌 내용의 일부다. 

폭스바겐은 스웨덴 배터리 제조사인 노스볼트와 협업해 2030년까지 유럽 내 배터리셀 공장 6곳을 설립해 총 240GWh의 배터리셀 자급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테슬라 모델3(싱글모터 50㎾h 기준)를 480만여대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지난해 테슬라가 50만여대의 전기차를 판매했다는 걸 감안하면 테슬라 연간 판매량의 9~10배에 달하는 배터리셀을 자체적으로 만들겠다는 게 폭스바겐의 플랜인 셈이다.[※참고 : 폭스바겐은 노스볼트 지분 20%를 보유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가 ‘완전한 배터리 자급’이란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폭스바겐은 파우치형(배터리 재료를 파우치 모양으로 감싼 것) 배터리가 아니라 각형(배터리 재료를 사각의 캔에 담은 것) 배터리를 채택할 것이란 계획도 밝혔다. 

폭스바겐은 그동안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급받았다. 삼성SDI가 각형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국내 배터리의 ‘완전한 배제’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폭스바겐이 자급 시스템을 갖추기 전인 과도기에 ‘국내 주요 배터리 업체와 손잡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건 사실로 보인다. 폭스바겐을 두고 “변심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실제로 폭스바겐 ‘파워데이’ 이후 국내 배터리 3사(LG화학ㆍ삼성SDIㆍSK이노베이션)의 주가가 곧바로 요동쳤다. 3월 15일부터 23일까지 3사의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탔다. LG화학의 이 기간 주가하락률은 19.8%, 삼성SDI과 SK이노베이션은 각각 9.0%, 11.6%였다. 

그런데 이 부분에선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선 ‘배터리 자립화’ 얘기부터 해보자. ‘배터리 자립화’는 얼핏 배터리 수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이지만 실제 목적은 배터리 단가를 낮추는 것이다. 

폭스바겐이 ‘배터리 자립화’를 위해 선택한 배터리가 각형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각형 배터리는 파우치형보다 공정이 덜 복잡하고, 규격화하기도 쉬우며, 기술적인 난이도도 낮다. 그래서 가격이 파우치형보다 저렴하다.

[※참고 : 한국이 강점을 가진 파우치형과 중국이 강점을 가진 각형은 분명 장단점이 있다. 파우치형을 비닐 팩 음료수에, 각형을 캔 음료수에 빗대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닐 팩은 변형이 쉽고 가볍지만 안정적이지는 못하다. 반면 캔은 변형이 어렵고 무겁지만 튼튼하다. 문제는 가격인데, 더 많은 공정이 필요한 파우치형의 가격이 비싸다. 에너지 효율은 뛰어나지만 가성비에선 밀린다는 거다.] 

폭스바겐이 파워데이 행사에서 “배터리 가격을 50%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존 공급업체인 LG에너지솔루션이나 SK이노베이션이 제시하는 배터리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배터리를 자체 생산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에 ‘배터리 자립화’를 선언했다는 거다. 

폭스바겐의 이런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완성차 제조업계의 선택에 따라 전기차 배터리 업계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거다. 이는 배터리 업계가 ‘자동차 시장’을 휘어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기존 분석을 뒤집는 가설이다.[※참고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은 전기차 배터리를 쉽게 개발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배터리 업계가 ‘완성차 제조업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폭스바겐의 선택은 ‘완성차 업체가 얼마든지 반격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실제로 완성차 제조업체들은 ‘혁신’을 앞당겨야 할 때다. 전기차 시대가 열리는 지금, 차값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배터리 가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기차 가격을 낮추지 못하면 성장이 더딜 게 뻔하다. 완성차 제조업체 입장에선 ‘저렴한 배터리의 자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하면 ‘폭스바겐의 변심’을 운운할 상황은 아니다.[※참고 :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소송전이 폭스바겐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국내 미디어들의 분석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결과란 비판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패권 경쟁

이처럼 전기차 마켓에선 시장 참여자들간 패권경쟁이 치열하게 전개 중이다. 배터리 형태의 경우, 각형ㆍ파우치형ㆍ원통형 3파전 양상이다. 소재 측면에서는 삼원계(한ㆍ일)와 인산철(중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놓고도 경쟁 중이다.[※참고 : 삼원계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 중 니켈ㆍ코발트ㆍ망간(혹은 알루미늄)을 양극재로 쓰는 배터리다. 양극재로 인산철을 쓰면 리튬인산철 배터리다.] 

전기차 시장에서 싸움을 벌이는 게 배터리 업체만도 아니다. 자동차 시장의 패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완성차 업체들의 기싸움도 만만치 않다. 폭스바겐이 각형 배터리를 통한 자립화를 선택해 파장을 일으킨 것처럼 패권경쟁이 펼쳐지는 다른 분야에서도 전기차 시장을 들었다 놨다 할 이슈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폭스바겐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새삼스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승자가 등장하지는 않아서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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