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서 비롯된 반도체 대란
세계 파운드리 80% 아시아에 쏠려
미국ㆍ유럽국가들 반도체 독립 선언

미국과 유럽이 ‘반도체 독립’을 선언했다. 반도체 공급 대란이 심각해지자 자체적으로 공급망을 확보하겠다는 거다. 반도체 독립의 핵심은 ‘생산능력’, 이를테면 파운드리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다. 세계 각국은 물론 인텔ㆍTSMC 등 반도체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해 생산능력을 확보하겠다고 나선 이유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반도체 투자 경쟁이 일찌감치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새로운 도약의 기회일까, 위기일까. 더스쿠프(The SCOOP)가 반도체 대란과 독립, 그리고 한국 파운드리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반도체 공급 대란이 심각해지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반도체 독립을 선언했다.[사진=연합뉴스]
반도체 공급 대란이 심각해지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반도체 독립을 선언했다.[사진=연합뉴스]

“못이 부족하면 편자를 잃어버린다. 편자가 없으면 말을 잃고, 말이 없으면 기수를 잃는다.” 미국의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긴 격언이다. 편자는 말발굽에 대는 쇳조각을 말한다. 작은 문제가 큰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인데,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를 일컬어 ‘21세기 편자의 못’이라고 칭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완성차 업계를 덮친 반도체 품귀현상 때문이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은 3만여개에 이른다. 그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1% 남짓이다. 하지만 1%에 불과한 반도체가 없어 공장문을 닫는 완성차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하니 그 여파가 자동차 부품업계, 철강업계까지 미치고 있다. 과연 반도체를 21세기 편자의 못이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반도체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스마트폰ㆍPCㆍTVㆍ서버 등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을 비롯한 미래 산업에선 그 쓰임새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반도체 품귀현상이 다른 산업에까지 번진다면 ‘기수를 잃는 것’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나친 우려가 아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차량용 반도체 품귀현상이 다른 반도체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미국ㆍ독일 등에서 돈을 더 줄 테니 차량용 반도체를 먼저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고, 그러다 보니 다른 제품들의 생산 계획마저 뒤로 밀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차량용 반도체에서 시작된 반도체 대란이 차량용 반도체 문제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럼 반도체 대란을 해결할 방법은 뭘까. 답을 찾으려면 원인부터 따져봐야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수급 밸런스가 무너져서다. 코로나19 탓에 자동차를 사려는 사람이 적을 것으로 예측한 완성차 업계는 지난해 반도체 주문량을 줄였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뜻밖에도 자동차 수요가 되살아났고, 완성차 제조업체는 부랴부랴 반도체 주문량을 늘렸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떠받치지 못하니, 반도체 대란이 터진 건 당연한 코스였다.[※참고 : 코로나19 국면에서 PCㆍ서버 등 수요가 급증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ㆍfoundry) 업체들의 공장은 풀가동 상태였다. 여기에 최근 차량용 반도체 업체들이 한파ㆍ화재로 생산에 차질을 빚으면서 반도체 공급 대란이 더욱 심각해졌다.]

물론 지금의 반도체 대란이 수급 밸런스가 무너진 탓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건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인 파운드리 업체의 희소성이다.

가령, 퀄컴ㆍ엔비디아ㆍ애플ㆍAMD처럼 생산시설 없이 반도체 설계만 하는 팹리스(fabless)는 숱하고, 그 수도 점점 늘고 있다. 반면, 팹리스로부터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해주는 파운드리 업체는 매우 드물다. 반도체 생산시설을 갖추기 위해선 막대한 투자비용이 드는 데다, 높은 수준의 미세공정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하청업체 취급을 받던 파운드리가 급부상하면서 반도체 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는데, 반도체 대란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면서 “반도체 공급망을 쥐고 있는 파운드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확보하려는 각국의 경쟁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의 말은 “반도체 대란을 해결할 방법은 뭘까”란 질문의 답을 제시해 준다. 그렇다. 파운드리(반도체 생산능력)를 늘리면 반도체 대란을 극복할 수 있다. 이는 세계 각국의 최근 행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반도체 공급망 복원을 위해 삼성전자, TSMC 등 관련 기업들과 회의를 가졌다.[사진=연합뉴스]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반도체 공급망 복원을 위해 삼성전자, TSMC 등 관련 기업들과 회의를 가졌다.[사진=연합뉴스]

미국과 유럽국가들은 최근 ‘반도체 독립’을 잇따라 선언했다.[※참고 : 사실 여기엔 파운드리 산업이 유독 아시아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다음과 같다. TSMC(대만) 55.6%, 삼성전자(한국) 16.4%, UMC(대만) 6.9%, 글로벌파운드리(미국) 6.6%, SMIC(중국) 4.3%. 글로벌파운드리를 제외하곤 모두 아시아 기업으로, 시장점유율 합은 83.2%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반도체 산업에 500억 달러(약 56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그중 대부분은 반도체 생산능력을 키우기 위한 파운드리 확대에 쓰일 공산이 크다. 12일(현지시간) ‘반도체 공급망 복원 회의’를 열고 삼성전자ㆍTSMCㆍ글로벌파운드리ㆍ인텔ㆍ알파벳ㆍGM 등 관련 기업을 초청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중국과 다른 나라들처럼 미국도 반도체에 공격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면서 본격적인 공급망 확보에 나서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독일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네덜란드 등 유럽국가들도 아시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최대 500억 유로(약 67조원)의 기금을 모으는 데 합의했고,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2030년까지 1345억 유로(약 180조원)를 투자해 세계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다. 

파운드리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건 각국 정부만이 아니다. 기업들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반도체 종가 인텔은 그중 한 곳이다. 최근 반도체 생산역량이 떨어져 위탁생산을 결정해야 했던 인텔은 지난 3월 생산능력을 대폭 확대해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겠다는 뜻을 밝혔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200억 달러(약 23조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2곳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미국과 유럽 등 기타 지역에도 추가 생산거점을 마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가 따져봐야 할 건 하나다. 각국의 반도체 독립 선언과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 바람이 국내 반도체 업계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는 점이다. TSMC를 쫓고 있는 삼성전자는 물론 이제 막 파운드리 사업을 키워나가고 있는 SK하이닉스시스템IC에도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어서다.

먼저 “단기적으로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금부터 공장을 짓기 시작해도 생산이 가능하기까지는 적어도 2년여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어서다.

김양팽 연구위원은 “파운드리 시장의 성장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경쟁이 극심해지기보다는 커진 시장을 나눠 먹는 수준이 될 것”이라며 우려를 일축했지만 반대의견도 있다.

이종환 상명대(시스템반도체공학)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국내 기업들엔 위기일 수 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 2위라곤 하지만 1위와의 격차가 여전히 크다. 아직은 실력과 규모를 더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너도나도 뛰어들면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공격적인 투자로 맞받아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이 매우 중요한 타이밍이다.”

‘21세기 편자의 못’ 반도체 패권이 파운드리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운드리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한 각국의 치열한 다툼이 예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연 우리나라는 반도체 명가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