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공사 석유비축사업의 함정
저유가 시기 구입량 늘리면 예산 절감
중장기 계획 탓에 유연한 대처 어려워

# 요즘 같은 고유가 시기,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가. “2020년 당시 유가가 쌀 때 정부가 석유를 많이 비축해뒀다면 지금 국내 유가는 더 낮아지지 않았을까.” 

#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석유공사는 ‘석유비축사업’을 통해 석유수급의 안정을 꾀한다. 그렇다면 석유공사는 이 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의문투성이다. 더스쿠프가 조금은 낯선 영역인 ‘석유비축사업’의 현주소를 해부해봤다.

정부의 비축유 확보계획은 국제유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정부의 비축유 확보계획은 국제유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8년 만의 고유가 시대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웃돈다. 시장에선 당분간 고유가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단기적으로 원유 공급이 크게 늘기 어렵고, 서방국가의 대對러시아 제재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당연히 국내 유가도 높게 유지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오피넷)에 따르면, 4일 기준 전국 휘발유와 경유의 평균 가격은 각각 1992원, 1913원이었다. 특히 휘발유 가격은 3월 내내 2000원을 웃돌았다. 

가계의 지출이 걱정되는 이 시점에서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해봤을 법하다. “가격이 쌀 때 기름을 많이 사놨다면 지금쯤 (고유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기름을 저장할 곳이 마땅치 않은 일반 가계로선 그저 상상일 뿐이다.

그럼 정부라면 어떨까. “정부가 유가 하락 시에 기름을 많이 사놨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유류세 인하가 아니라 값싼 기름을 공급해서 가격을 낮출 수 있을 텐데….”

이는 상상이 아니다. 실제로 정부는 기름을 사놨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 석유비축사업을 통해서다. 오일쇼크와 같은 위기를 대비해 석유수급 안정을 꾀하고자 1980년부터 진행해온 사업인데, 한국석유공사가 이를 관리한다. 


2021년 말 기준 우리나라엔 9개(원유비축 4개ㆍ제품비축 4개ㆍLPG비축 1개)의 비축기지가 있다. 여기엔 총 1억4600만 배럴의 규모의 원유와 석유제품을 비축할 수 있다.[※참고: 정부는 이 사업을 통해 위기 시 비축유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석유 수급에 대응해왔다. 1991년 걸프전이나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이 비축유를 방출해 수급 안정을 꾀했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상황에서도 정부는 약 442만 배럴의 비축유 방출을 추진하고 있다.]

이쯤에서 살펴봐야 하는 건 석유공사의 석유비축사업이 ‘유가가 쌀 때 많이 비축’하고, 각종 리스크 탓에 ‘유가가 비쌀 때 방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석유공사는 현재 9750만 배럴(공동비축물량 제외ㆍ2021년 말 기준)의 비축유를 확보하고 있다. 비축기지의 비축 가능 수준의 66.8%다. 비축유는 2017년 9570만 배럴에서 2019년 9650만 배럴로 60만 배럴 늘었다. 연평균 30만 배럴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2020년에는 전년보다 40만 배럴 더 늘어난 9690만 배럴이었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애초에 설정된 비축계획에 따라 비축유를 확보하는데, 2020년엔 저유가로 인해 연간 비축유 구입량을 당초 계획보다 두배가량 늘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비축유 운용시스템만 제대로 손봐도 고유가 리스크는 지금보다 약해졌을지 모른다.[사진=연합뉴스]
정부가 비축유 운용시스템만 제대로 손봐도 고유가 리스크는 지금보다 약해졌을지 모른다.[사진=연합뉴스]

저유가 시기(2020년)에 비축유를 늘렸으니 꽤 적절히 대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착시에 불과하다. 전체 비축유 증가분이 너무 적어서다. 2019년 평균 국제유가(두바이유 기준)는 배럴당 63.53달러에서 2020년 평균 42.29달러로 33.4%나 하락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비축유는 9650만 배럴에서 9690만 배럴로 고작 0.4% 늘어나는 데 그쳤다. 분명 비축유 구입량 자체는 늘었지만 저유가 시기에 예산을 탄력적으로 운용해 비축유를 ‘획기적’으로 늘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더구나 한국석유공사는 2020년 4월 “저유가 시황을 활용하겠다”면서 당초 비축유 구매 예산을 314억원으로 책정했지만 실제 사용한 예산은 177억원에 불과했다.[※참고: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셰일오일이 넘쳐나자 고유가 시대가 끝났다고 판단, 석유 비축량을 줄이기로 했다. 이 때문에 2017년 이후 비축유 확보계획에선 비축유 구입량이 크게 줄었다. 2019년 비축유 확보계획에 명시된 비축유 구입량은 2016년 비축유 확보계획 상 비축유 구입량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비축유 늘었지만 예산은 감소

더구나 2020년 당시는 정유업계가 “재고가 차고 넘친다”면서 석유공사 측에 비축유를 더 늘려달라고 요청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만약 이 무렵 정부가 비축유 예산을 더 늘리고, 비축기지 대비 비축유 비중을 80% 이상으로 높이는 등 비축량을 늘렸다면 어땠을까.

비축유를 이 수준까지 늘리는 데 필요한 물량은 약 2000만 배럴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휘발유와 경유 소비량은 2억5000만 배럴이란 점을 감안하면, 한달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석유를 지금의 절반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자 석유공사 관계자는 “전세계적인 친환경 기조와 함께 석유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유가가 낮다고 비축유를 늘리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해명이다. 

지난 8년간 국제 유가가 곤두박질친 건 두번(2016년 1월과 2020년 4월)뿐이다. 2016년 1월에는 셰일오일의 등장으로 저유가 기조가 형성되면서 국제 유가가 급락했고, 2020년 4월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국제 유가가 가파르게 하락했다. 물론 저유가 전망이 팽배할 때는 비축유를 늘릴 필요가 없다. 가격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서다. 

문제는 2020년 4월 이후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친환경 에너지 전환의 여파로 수요가 감소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수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2015년 이후 2020년 전까지 매년 10억 배럴 이상의 원유를 수입했고, 원유 정제를 통해 나오는 석유제품의 3분의 2가 내수에 쓰인다. 경제는 석유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인 반면, 석유는 전부 수입한다. 아직은 전략적으로 비축유를 운용해야 할 상황이라는 얘기다.

특히 2019년 대비 2020년 석유 소비량은 약 5500만 배럴이었다. 비축기지는 4800만 배럴을 더 비축할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단지 탄력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당초 목적인 수급 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는 얘기다. 

케케묵은 시스템 손봐야 

사실 그동안 정부가 탄력적으로 비축유 운용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은 꽤 많았다. 너무 중장기에 치중한 석유비축계획 때문에 그때그때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거다. 현재의 석유비축계획은 2014~ 2025년까지의 계획을 담고 있다. 장기적인 목표치를 설정해놓고 그 목표치를 달성하는 식이다 보니 가격에 대한 대처는 거의 못 하는 셈이다. 

하지만 가격 대응은 매우 중요하다. 언급한 것처럼 값이 쌀 때 석유를 구입하고, 비쌀 때 방출하면 정부의 재정건전성도 좋아질 수 있어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유가가 쌀 때 석유를 비축하면 그만큼 적은 재원으로 효과를 보는 셈”이라면서 “중장기적으로 정부 재정건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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