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민단체의 목소리

금융사건이나 사고에 얽힌 피해자는 사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은행·카드사 등 금융회사들이 문제 발생 시 빠져나갈 만한 ‘구멍’을 각각의 상품에 넣어놨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피해자가 발생해도 피해보상작업이 쉽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고를 친 금융회사가 빠져나갈 구멍이 막히고 있다. 금융시민단체가 목소리를 조금씩 내면서다. 금융시장을 바꾸고 있는 금융시민단체의 목소리와 한계를 짚어봤다. 

금융시민단체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금융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점이다. 사진은 2014년 대국민 사과에 나선 카드 3사 대표들.[사진=뉴시스] 
금융시민단체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금융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점이다. 사진은 2014년 대국민 사과에 나선 카드 3사 대표들.[사진=뉴시스] 

# 직장인 최웅수(가명·44)씨는 2020년 3월 18일을 특별한 날로 기억한다. KB국민카드와 롯데카드로부터 22만749원의 입금된 날이어서다. 이 돈은 2014년 터진 카드사 정보유출 손해배상소송으로 받은 위자료였다. 

최씨는 2014년 1월 발생한 카드사 정보유출 사건의 피해자였다. 당시 KB국민은행(5300만건)·NH농협카드(2500만건)·롯데카드(2600만건) 등 3곳의 카드사에서 1억4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면서 최씨도 피해를 당했다. 최씨의 이름은 물론, 주소·주민번호·휴대전화번호 등 19종의 개인정보가 모두 유출됐다.

[※참고: 당시 고객정보를 빼돌린 건 카드사에 파견 근무를 나온 신용평가사 코리아크레딧뷰로(KCB)의 직원이었다. 그는 USB를 이용해 전산에 들어 있는 개인정보를 무작위로 내려받았다.]

사건이 터지자 카드 3사 대표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고객 앞에 머리를 숙였다. 이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긍정적인 반응이 잇따랐지만, 거기까지였다. 카드 3사는 ‘피해를 보상하겠다’면서도 정보유출로 신용카드가 부정하게 사용된 예는 없다고 항변했다. 카드 3사가 내놓은 보상은 월 200~300원의 문자알림서비스 무료화가 전부였다. 

이 사건으로 카드사는 국민적 공분을 샀고, 정보유출의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소송이 이어졌다. 최씨는 그해 3월 금융시민단체인 금융소비자연맹이 진행한 공동소송에 참여했다. 당시 금소연은 2만여명의 피해자를 모아 공동소송에 나섰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카드사는 1심과 2심 재판에서 패소했지만 항소로 맞섰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던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2019년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후에야 그들은 보상에 나섰다. 사건이 터지고 6년 만에 손해배상이 이뤄진 셈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탓에 사건을 잊고 있던 최씨는 금소연의 연락을 받고서야 소송에서 이긴 걸 알게 됐다. 최씨는 위자료를 받은 것보다 금융회사의 잘못에 책임을 물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뒀다. 카드 3사 사건은 정보유출 사건으로 피해자에게 보상이 이뤄진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 2020년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로 홍역을 앓았다. 그 가운데엔 5000억원대의 환매 중단 사태를 일으킨 옵티머스 펀드 사태가 있었다. 이 사태에서 드러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금융회사를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이 제 역할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 7월 감사원이 발표한 ‘금융감독기구 운영실태’ 감사 결과를 통해 알려졌다. 

금감원은 옵티머스가 펀드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도 현장 검사를 실시하거나 수사기관과 금융위원회에 통보하지 않았다. 또한 옵티머스가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95% 이상 투자하겠다’는 보고서와 달리 일반 회사채에 투자하는 내용의 집합투자규약을 첨부했는데도 곧이곧대로 인정했다. 

계속해서 터지는 금융사건·사고

옵티머스 펀드에 문제가 있다는 국회의 지적에도 무사안일하게 대응했다. 옵티머스의 설명만 듣고 국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감사원은 45건의 위법·부당사항이 확인하고, 금감원 직원 4명과 한국예탁결제원 직원 1명에겐 징계, 17명의 임직원엔 주의, 24건의 기관통보를 의결했다.  

흥미로운 점은 감사원의 감사가 시민단체의 요구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2020년 10월 28일 금융정의연대,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금융감독원의) 부실한 금융기관 감독이 DLF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며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고, 감사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금융시민단체의 목소리가 DLF 문제를 푸는 ‘단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두 사례에서 보듯 금융사건·사고에서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는 건 난제다. 이런 유형의 사건·사고가 줄어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전자금융사고는 356건으로 2020년 328건 대비 8.5% 증가했다. 금융사고로 인한 피해 금액도 적지 않다. 

금융감독원의 ‘금융사고 발행현황 및 대응방안’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사고금액은 3108억원에 달했다. 2020년 DLF 사태 등의 금융사고 터졌다는 걸 감안하면 사고금액은 더 증가했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금융감독기구는 해마다 늘어나는 금융사건·사고에 대비해 어떤 전략을 펼치고 있을까. 금융사건·사고를 일으킨 금융회사엔 피해에 걸맞은 처벌을 부과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솜방망이 처벌 논란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사고를 친 금융회사가 과징금 몇푼으로 사건을 때운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간혹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 징계가 이뤄지긴 하지만 행정소송 등으로 처분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회장이나 대표에 연임하는 일도 수없이 많다. 

금융사건‧사고가 터지면 금융회사는 금융소비자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손실 구제에는 여전히 소극적이다.[사진=뉴시스]
금융사건‧사고가 터지면 금융회사는 금융소비자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손실 구제에는 여전히 소극적이다.[사진=뉴시스]

금융시민단체와 피해자들이 국회나 금융감독기구, 사고를 친 금융회사를 찾아가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변화의 물결이 조금씩 일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카드3사 개인정보유출 손배소’ ‘옵티머스 공익감사청구’처럼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금융감독기관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사례는 더 있다. 2016년 대법원이 소비자의 손을 들어준 ‘생명보험사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건’, DLF 사태 때 금융감독원이 분쟁조정 비율을 역대 최고 수준인 손실액의 80%까지 인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사례다. 무엇보다 지난해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금소법)’을 발의한 후 10년 만에 국회의 문턱을 넘은 것도 금융시민단체가 법안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요구해온 결과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처장은 “금융소비자의 의식이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다”며 “아울러 SNS 등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만한 창구가 많아졌다는 게 변화를 이끈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반쪽짜리로 전락한 금소법의 현주소

하지만 갈 길이 여전히 멀다는 지적도 많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그 예로 반쪽자리로 전락한 금소법의 현주소를 꼬집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금융소비자의 피해를 구제하고, 금융회사에 책임을 물을 수단으로 꼽혀온 집단소송제와 징벌적손해배상제는 아직까지 반영되지 않았다. 금융사고가 터졌을 때 입증책임 문제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금소법에선 설명의무를 위반했을 때만 금융회사에 입증책임이 있다고 규정해 놨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이어 “가장 시급한 것은 반쪽짜리로 전락한 금소법을 개정하는 일이다”면서 “징벌적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대형 로펌을 앞세운 금융회사에 맞설 수 있다”고 꼬집었다. 작은 목소리가 세상을 바꾸려면 그 목소리를 퍼지게 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단 거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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