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탐구생활-사각사각
어린 은지가 본 세상
구조적 문제 해결해야

더스쿠프와 전문가가 함께 하는 ‘같이탐구생활-사각사각’ 세번째 편은 아픈 엄마를 간호하며 간호사를 꿈꿨던 서은지(가명·23)씨가 10대 시절 바라봤던 세상입니다.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심코 저지르는 실수, 보호막은 있지만 세심하지 못한 탓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 은지의 세상으로 들어가 볼까요?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제2, 제3의 은지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제2, 제3의 은지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은지가 스무살이 되던 해, 뇌졸중을 앓던 엄마는 ‘하늘의 별’이 됐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엄마까지 간호하느라 예상치 못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처럼 어른이 된 은지 앞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은지는 어릴 적 자신처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돼주겠다면서 ‘멘토’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2022년, 스물세 살이 된 은지는 예민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립니다. ‘좋은 지원책이었는데, 왜 그렇게 예민했을까’란 자책이 들기도 하지만, ‘꼭 그래야만 했을까’란 아쉬움도 많습니다. ‘어린 은지’의 눈에 비친 정책적 결함, 그리고 우리 사회가 무심코 저지르는 실수는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학창 시절 은지를 힘들게 한 건 아픈 엄마도, 부족한 돈도 아니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은지에게 꽂히는 차가운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은지는 기초생활수급자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은지를 기초생활수급자로만 바라봤습니다. 가정통신문이 배부되는 날이면 은지의 집안 사정은 친구들에게 자질구레한 것까지 노출됐습니다. 급식실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은 “쟤는 왜 급식비를 안 내느냐”며 수군거렸습니다.


사실 그건 노출돼선 안 되는 정보들이었습니다. ‘학생인권’이라는 것이 보장되지 않던 오래전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학생인권조례가 마련된 2010년 이후엔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참고: 학생인권조례는 학생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전국 16개 시·도 교육청별로 제정·공포해 시행하는 조례다. 2010년 경기도가 가장 먼저 공포했고, 광주광역시(2011년), 서울시(2012년), 전라북도(2013년), 충청남도(2020년), 제주특별자치도(2020)에서도 관련 조례를 시행 중이다. 여기엔 차별받지 않을 권리,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권리 등이 명시돼 있다.] 


2012~2017년도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은지는 왜 상처받아야 했을까요? 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교육 현장에서 무심코 저지른 실수, 수요자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은지를 조용히 따로 불러 가정통신문을 전달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은지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기초생활수급자 안내문을 수령할 일이 없지 않았을까요? 

이는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구조적인 문제 탓이기도 합니다. 정재훈 서울여대(사회복지학) 교수는 “학교에서 돈 만지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정 교수의 얘기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독일에서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각종 예산 업무를 지자체에서 책임집니다. 가령, 학교 급식비를 학교 행정실이 아닌 지자체에 내는 거죠. 그러면 학생들의 정보가 노출될 일이 없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원해줄 게 있으면 지자체에서 알아서 처리해주니까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정보가 공개될 일이 없습니다.” 정책이 세심하지 못해 그로 인해 학생들이 상처를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정 교수는 우리 교육 현장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학교의 행정 업무를 독일처럼 지자체로 이관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교육청이 그 역할을 한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겠죠. 그렇다면 학생들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고, 업무 부담 때문에 무심코 저지르는 교사들의 실수도 줄일 수 있습니다.”

취약계층의 학생들을 위해 독일교육에서 벤치마킹할 수 있는 건 또 있습니다. 은지처럼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배움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전일제학교’ 시스템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후보들이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 및 운영시간을 확대해 초등 전일제학교를 운영하겠다(윤석열)” “독일식 전일제 교육을 벤치마킹한 전일제 학교 교육시스템을 도입하겠다(안철수)”고 공언했던 바로 그 전일제학교입니다. 


독일의 전일제학교는 ‘하루 7시간 이상 학교에 머무는 날이 일주일에 최소 3일 이상’인 학교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정규수업 시간 이후에도 학교가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시스템입니다. 일·가정 양립을 가능케 한 제도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도입 배경이 흥미롭습니다. 

복지는 공급자 중심이 아닌 수요자 중심으로 개편돼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복지는 공급자 중심이 아닌 수요자 중심으로 개편돼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독일 교육계는 2001년 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결과를 받아들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독일이 32개 참여국 중 중하위권에 머물렀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 학력 수준이 생각보다 낮은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건 경제적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 성적 격차가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시스템 전반에서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렇게 등장한 것이 ‘전일제학교’입니다. 취약계층의 교육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제도가 ‘전일제학교’란 겁니다.[※참고: PISA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3년마다 실시하는 국제학생능력평가다. 각국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만 15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읽기·수학·과학 등 세가지 부문을 평가한다.]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 교육계와 정치인도 “제2?제3의 은지를 만들지 않겠다”며 끊임없이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 약속이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중심에서 설계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이제 성인이 된 은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박현홍 러빙핸즈 대표
lovinghands@lovinghand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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