섈 위 아트 | 자매들, 우리는 커진다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1999년 홍대서 개관한 대안공간 루프는 한국 미술계에 ‘대안공간’이라는 개념을 알렸다. 울산시립미술관 관장인 서진석 대표가 그 출발점을 제시했다. 당시만 해도 주류 미술계에선 전시하는 게 어려웠던 작가들의 작품(사진·디지털기술 등)을 중심으로 기획전을 진행했다. 

이렇게 출발한 대안공간 루프는 1990년대 말 한국 예술계의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트스페이스휴의 김노암 감독, 네오룩의 최금수 평론가 등이 그 혁신의 시대를 대안공간 루프와 함께 보냈다. 흥미롭게도 그때는 IT혁명이 일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혁신이 IT를 넘어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서진석, 김노암, 최금수 등 당대를 대표하던 젊은피는 한국 미술을 좀 더 젊고 도전적인 무대로 만들었다. 

이들의 크고 작은 노력은 1조원대 프리즈아트페어가 한국시장에서 열리고, 젊은 예술 애호가들이 탄생하는 데 문화적 기반이 됐다. 어쩌면 1990년대 문화를 선도한 그때 그 젊은 세대가 품었던 지식과 지혜가 MZ세대의 탄생을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이같은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대안공간 루프는 성장을 거듭했고, 조금씩 전문성을 갖춰갔다. 10월 23일까지 열리는 ‘서울-샌프란시스코 교류전’은 대안공간 루프의 미래 방향을 잘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전시명은 ‘자매들, 우리는 커진다(Sisters, We Grow: Seoul-San Francisco Exchange Exhibi tion)’이다.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양지윤 디렉터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에코페미니즘’과 ‘자본주의 탐구’란 두가지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대안공간 루프가 여는 기획전답게 다소 어렵다. ‘에코페미니즘’이란 용어도 그렇지만, 이를 자본주의와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럼 이 어려운 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독일 여성 최초로 물리·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클라라 이머바르의 자살을 통해 이 어려운 논제를 풀어보려 한다.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농경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극복해 왔다.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들이 태어난 지형에 영향을 받으며 진화와 멸종이란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인류만은 달랐다. 농경을 통해 겨울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경을 발판으로 생존에 성공한 인류는 ‘질소비료’를 발명해 더 큰 욕망을 키워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1909년 유대인 출신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공기 중 질소를 농축해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하버법’을 개발했고, 뒤이어 살충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하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하버법’을 이용해 바닷물을 이용한 염소 독가스를 개발했다. 생존의 기술을 살상의 기술로 만든 셈이다.[※참고: 하버는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연구해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 개발·살포를 주도해 ‘독가스의 아버지’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물리화학 학자 클라라 이머바르(Clara Hel ene Immerwahr)는 하버와 결혼한 후 남편의 연구를 돕는 제한적 역할만 맡아야 했다. 여성 과학자를 옭아맨 사회적 관습 탓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머바르는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버가 자신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염소 독가스가 벨기에를 성공적으로 공격해 자축 행사가 열리던 날 밤, 이머바르는 죄책감에 자살을 선택했다.

[※참고: 이머바르가 자살한 이유를 두곤 여러 설이 존재한다. 다만, 하버가 개발한 염소 독가스가 전투에 투입돼 수만명의 사상자를 낳은 게 직접적인 자살 원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위키백과).] 

이머바르의 자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피로 얼룩진 제국주의와 초기 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다. 어쨌거나 인류는 코로나19란 팬데믹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

양지윤 디렉터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유효하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우리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과 그 역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자매들, 우리는 커진다’ 전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에선 ‘에코페미니즘’을 중심으로 자연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가장 자연다운 자연을 고찰함과 동시에 농경 산업화·자본주의 전환 과정에서 배제됐던 여성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설치작품들.[사진=대안공간 루프 제공]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의 초점도 ‘자연’과 ‘여성’에 맞춰져 있다. 1980㎡(약 600평) 규모의 제주도 땅에서 아로니아 농사를 하고 있는 6년 차 농부 작가 이다슬은 환삼 덩굴이라는 잡초를 전시장에서 기른다. 엠마 로건의 ‘땅을 양도하기(Ceding Ground)’는 서부 개척과 식민지 역사가 담긴 북부 캘리포니아의 땅을 주제로 한다.

권은비 작가는 관객과 함께 퇴비를 만드는 장치 ‘실패의 장소 안에 퇴비(Com-post in the place of fail ure)’를 전시장에 설치했다. 김나영 작가와 그레고리 마스는 ‘야외의 죽음(Death of the Outdoor)’이란 작품에서 채소가 음식으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로 조각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회는 오는 12월 샌프란시스코 아트 커미션에서 다시 열린다. 2023년에는 콜파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에코페미니즘의 가치와 더불어 지금의 자본주의를 탐구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전시회를 추천한다. 


김선곤 더스쿠프 미술전문기자
sungon-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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