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민우 뉴스페이퍼 대표
그날 그곳에 있었던 시민의 눈물

# 평범한 일상을 살던 시민이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156’이란 숫자에 담기조차 어려운 참사였습니다. 상처는 여기저기 났습니다. 그날 그곳에 있었던 시민들의 마음에도 생채기가 났습니다. 

# 그날 그곳에 있었던 이민우(33) 뉴스페이퍼 대표에게도 ‘아픈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를 만나 나눈 이야기는 서울시청이 안전 안내 문자를 발송한 10월 29일 23시 56분부터 10월 30일 오전 4시 3차 현장 브리핑이 진행되기 전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는 자극적인 말을 삼갔습니다.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시민을 대표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를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름 모를 시민들의 아픔과 공권력이 왜 제힘을 내지 못했는지 등을 어림잡을 수 있습니다. 

# 의미나 뉘앙스가 달라지는 걸 최대한 막기 위해 이 대표의 말을 거의 그대로 실었습니다. 그날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께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10월 29일 23시 56분. 정부는 안전 안내 문자(재난 문자)를 발송했다. ‘[서울특별시청]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 호텔 앞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통제 중. 차량 우회바랍니다’. 이 문자를 받고 그곳으로 간 시민들도 있었다. 문학전문지 뉴스페이퍼를 운영하고 있는 이민우(33) 대표는 그날 재난 문자를 받은 시민 중 한명이었다.

[※참고: 이 기사 속에는 다친 사람, 구하려는 사람, 유명을 달리한 사람 등이 등장한다. 구분을 위해 참사 현장에서 구조를 자임했던 사람의 호칭은 ‘시민’으로 통일했다. 이민우 대표가 해밀톤 호텔 앞에 도착한 시간, 한남대로를 달리던 시간, 병원 도착 시간은 일반적인 이동 속도와 휴대전화 위치 추적 기록 등을 통해 추정했다.]


# 10월 29일 23:56 재난 문자 후 

✚ 그날 왜 이태원에 가셨나요? 
“핼러윈 행사 관련 중계 때문에 이태원 근처에 있는 반얀트리 호텔에 있었습니다. 자정까지 진행하는 행사였는데 도중에 재난 문자를 받았어요.”

이민우 대표가 있었던 반얀트리 호텔은 해밀톤 호텔과 차로 10분 거리(5.2㎞)에 있다.  

✚ 재난 문자를 보고 무작정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가요?
“해밀톤 호텔의 위치를 보니 (제가 있는 곳과) 아주 가깝더라고요. 마침 중계 장비 등의 설치를 마무리해서 카메라만 돌리면 되는 상황이었죠. 그걸 담당할 우리 직원도 있었고요. 그래서 갔던 겁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언제 알았나요? 
“남산에서 장충단로로 내려와서 이태원으로 향했습니다. 한남 제1고가차도 아래를 지날 때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습니다.”

10월 29일 18시 34분 112신고센터에 “해밀톤 호텔 인근에 사람이 너무 몰려 위험하다”는 최초 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그곳에선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무서운 전조였지만, 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참사는 최초 신고가 접수된 지 4시간여가 흐른 22시 15분에 터졌다. 따지고 보면, 서울시가 재난 문자를 발송한 건 그로부터 1시간 50분이 지난 뒤였다. 11월 1일 정부는 재난 문자를 늦게 발송했다는 걸 인정했다. 

✚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은 이유는 뭔가요? 
“사람들이 이미 반대 방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어요. 한두명 모여있거나 많이 모였다는 느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썰물처럼 밀려나오는 듯했죠. 화재는 아니지만 뭔가 큰일이 났다 싶었습니다.” 

✚ 차를 이용해 해밀톤 호텔까지 이동했나요? 
“아니요. 이미 사람들이 도로를 차지하고 걸어오고 있었어요. 차를 가지고 더 들어갈 수 없었죠. 그래서 도로변에 차를 댔습니다.” 

✚ 교통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나요.
“처음에는 없었지만 금방 시작됐습니다. 한강진역 인근에서 경찰들이 차량 통제를 시작하자 차들이 도로에 두줄씩 붙었습니다. 도로 한 차선은 완전히 주차장처럼 변했고요.” 

✚ 그래서 차를 두고 걸어갔군요.
“네, 해밀톤 호텔로 가면 갈수록 더 혼잡해졌습니다.”

# 10월 30일 00:21 해밀톤 호텔 앞

✚ 처음 본 상황은 어땠나요? 
“소방관과 경찰들이 와서 구호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방관과 경찰관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제 눈에 보인 정복을 입고 있던 사람들은 10명 남짓이었어요.” 

✚ 그럼 대표님은 사고 현장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던 건가요.
“예. 근처에 계속….” 

✚ 도움을 청하거나 다른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온 이들도 있었는데 이미 해밀톤 호텔 골목과 큰 도로(이태원로)는 아수라장이었어요. 모두 ‘살려달라’ ‘도와달라’ 외치고 있었죠. 탈출한 사람들과 갇힌 사람들을 구하려는 시민들이 뒤엉켰어요. 거의 모든 시민이 넘어지고 깔린 사람들 옆에 붙어서 빼내려고 노력했죠.”

서울시청은 10월 29일 23시 56분에 첫번째 안전 안내 문자를 발송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서울시청은 10월 29일 23시 56분에 첫번째 안전 안내 문자를 발송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 동시다발적으로 시민들이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지휘 체계가 있거나 누군가 명령을 내리거나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각자 자리에서 시민들이 (깔린 사람들을) 빼내려는 분위기였습니다.”

✚ 그런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습니까.
“구호 활동을 한참 했어요. 그러다 빠져나온 사람들 중엔 의식이 없는 이들도 많았죠. 곧바로 CPR(심폐소생술ㆍCardio Pulm onary Resuscitation)을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 시민들이 CPR을 자발적으로 한 건가요? 
“소방관이 CPR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한테 외쳤어요. 그런 요청이 있기 전에도 이미 몇몇 시민은 CPR을 하고 있었어요.”

✚ 체계는 없었지만 다들 구호 활동을 하려고 했던 거군요. 
“네. 하지만 저 같은 일반 시민에겐 너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 어떤 점이 제일 힘들었나요?
“많은 시민이 적극적으로 CPR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다보면 피해자의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요. 입에서 거품이 나오기도 하고요. CPR을 하던 시민은 그러다가 ‘내가 구하려던 사람이 죽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게 돼요. 그 자체로 패닉이죠. 해밀톤 호텔  골목 일대가 모두 그랬어요. 깔려 있다가 탈출해서 패닉이 온 사람, CPR을 하다가 충격을 받은 사람,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이 그 골목(해밀톤 호텔 골목) 입구에 들어차 있었어요.” 

✚ 돌아가신 분들과 의식 없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도 벅찼군요.

“맞습니다. 당시엔 부상자를 살필 여력이 없었어요. CPR을 도울 시민도 부족했죠. 소방관과 경찰이 사람을 빼내는 데 성공하면 다시 CPR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소방관과 경찰관은 사람을 계속 빼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시민이 와서 CPR을 해줘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서 ‘CPR 할 수 있는 분’을 외치고 또 외쳤죠. 누군가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건 한참 후의 일이었어요.” 

✚ 일단 깔린 사람을 구하는 것이 먼저여서 다음 상황까지 감당할 수 없었던 거군요.
“가장 큰 문제는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시민들이 CPR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겁니다.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죠. 숨을 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언제까지 가슴을 눌러야 할지 몰랐어요. CPR을 하면 몸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말을 하지 않아도 입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중엔 이미 사망한 분도 있었을 텐데, 가늠하지 못했죠. CPR은 일반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 그런데도 시민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뭔가요? 
“경찰과 구조 대원들이 추가로 더 오기 전까진 시민들이 메꿔야 했어요. 전문인력이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일반 시민이 힘을 보태야 했죠. 깔린 사람을 빼낼 때도 정말 많은 시민이 동원됐어요. 현장에 있던 시민들 중에서 손 놓고 구경만한 이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 01:54 한남대로 위

10월 29일 22시 43분. 소방당국은 대응 1단계를 발령했다. 23시 13분에는 대응 2단계, 23시 50분에는 대응 3단계로 격상했다. 대응 1단계는 재난 발생 지역의 긴급구조대가 대응할 수 있을 때, 대응 2단계는 시ㆍ도 긴급구조대가 필요할 때 대응 3단계는 중앙통제단이 필요할 때다. 전국 동원령이다.  

✚ 소방관과 경찰관 인력이 늘어난 건 언제쯤이었나요.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체감상 꽤 걸렸어요.”

✚ 경찰, 소방관, 의료진 등 전문인력이 늘어나고 상황이 바뀐 게 있나요? 
“그쯤 되니 주변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을 옮겨야 했습니다. 구급 대원들도 오고 경찰관들도 왔지만 차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함께 있던 사람들과 부상자들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죠. ‘차 있는 사람 있는가’ ‘그럼 차는 어디에 주차했는가’ ‘차를 가져와서 부상자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자’ 등등의 말이었죠. 이런 논의 끝에 부상자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죠.” 

✚ 부상자 이송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린 판단인가요.
“더 이상 CPR로 사람들을 구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던 것 같아요. 그때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보살펴야 했으니까요. 그제야 그 사람들을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돕겠다는 이들이 많았죠.”

✚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갔던 겁니까. 
“예.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다들 차를 밖에다가 두고 왔어요. 가지고 더 들어올 수가 없어서.”

✚ 다시 차를 끌고 나와야 했군요.
“네, 그랬어요. 경찰은 제가 이곳으로 왔던 도로를 이미 통제하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친구나 가족을 찾으러 온 것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도가 꽉 찼어요. 그걸 뚫고 나가야 했습니다.”

✚ 그 후엔 어디로 향했습니까.
“누가 그 앞에서 서서 방향을 안내하는 게 아니었어요. 구급차가 있으면 그 뒤를 그냥 따라가야 했죠. 어딘지 알 길이 없으니 그냥 쫓을 수밖에 없었어요.”

# 02:43 병원 앞

✚ 병원에 자리는 있었나요? 
“처음 간 병원은 포화 상태였어요. 지금 어딘지도 기억이 안 나요. 구급차만 쫓아갔으니까요. 병원 입구에 다친 사람들이 모여 있을 정도로 환자가 많았어요.”

✚ 그런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나요?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어요. 무작정이요. 근처 병원에 응급실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어요. 멀리 있는 병원을 수배하기도 했죠. 병원도 바쁘다 보니 전화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아서 그냥 출발하기도 했습니다. 병원 두곳을 갔는데 모두 포화 상태였어요. 그렇게 돌고 돌다가 서울 특별시 보라매병원으로 향한 사람들도 있었던 거죠.”

국립중앙의료원은 ‘응급실 종합상황판’을 운영한다. 1시간 단위로 갱신되는 응급실 현황은 접속자의 위치를 기준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런 사실을 모르는 시민들은 추측만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도착하니 진료가 가능한 상황이었나요.
“저와 함께 병원으로 향한 구급차는 1대였습니다. 제 차에 타셨던 분은 아주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온몸이 아프다고 했어요. 제가 조금이라도 만지면 아프다고 하셔서 뼈가 부러졌거나 잘못 건드려서 안에서 뭔가 터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습니다.” 

✚ 부상자 분을 병원에 이송하고 다시 이태원으로 가려고 했나요. 
“네. 병원으로 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기자인데 그곳으로 다시 가서 소방 당국과 경찰이 진행하는 현장 브리핑을 들어야겠다고요.” 

✚ 그때가 몇시였습니까.
“새벽 3시를 좀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 재난 문자를 받고 병원에서 다시 이태원으로 돌아오는 동안 무엇이 가장 필요했나요?
“저한테요? 아니면 사람들에게요?”

✚ 그 상황에서요.
“인력이 가장 필요했어요. 만약 더 많은 인력이 그곳에 있었다면, 깔린 사람들을 빼내는 시간이 훨씬 더 빨라졌을지 몰라요. 사건이 벌어진 초반에 인력이 너무 부족했어요. 제가 재난 문자를 받기 전까지 이미 여러 단계를 건넜을 겁니다. 그쯤이면 상황이 인지됐을 거고, 정부에서도 알았을 겁니다. 그렇게 확보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재난 문자로 알렸을 테고요. 하지만 제가 도착했을 땐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여전히 초동 대처밖에 못하는 상황처럼 보였어요. 사람이 더 많았다면…. 물론 가정은 의미가 없겠지만요.” 

이번 이태원 참사의 책임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태원 참사 현장을 살펴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사진=뉴시스]
이번 이태원 참사의 책임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태원 참사 현장을 살펴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사진=뉴시스]

✚ 참사 현장에 계셨는데,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가 모두를 대표할 순 없습니다. 그걸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중학생 때 대구 지하철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대학생 땐 세월호가 침몰했죠. 그건 제가 손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어요. 손을 뻗으면 갇힌 사람들을 빼낼 수 있고, CPR을 열심히 하면 살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거기 있던 거의 모든 시민의 마음이 그랬을 겁니다. 재난 문자를 받고 그곳으로 향했던 건 과거의 부채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찌 보면 구호 활동은 상당히 폭력적인 환경에서 벌어집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죽은 사람을 보는 게 처음이었을 겁니다. 자기가 구하려고 했던 사람이 죽는 걸 손으로 느낀 것도 처음이었을 거고요. 그런데도 시민들은 사람들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어요.” 

이 대표는 사람을 도왔다. 다른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조가 있었지만 공권력은 두세발 늦었다. 현장을 감당하기엔 인력도, 힘도 부족했다.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책임 공방이 뜨겁다. 그 중심엔 내 탓이 아니라는 항변이 깔려 있다. 사람들을 구하려 했던 그날의 시민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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