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오바마 ‘쉽게 쓰기 법’의 함의
어려운 언어에 숨은 위험요인
루나 코인 사태 난해함서 시작
미아동 정비사업서 벌어진 일
불편한 행정용어·계약서의 민낯
그들만의 용어로 쓴 공소장·판결문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0년 '쉽게 쓰기 법'에 서명했다. [사진=뉴시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0년 '쉽게 쓰기 법'에 서명했다. [사진=뉴시스]

# 흥미로운 법 

미 의회가 ‘오바마 케어법(Affordable Care Act)’을 두고 격렬하게 대립하던 2010년. 다른 한편에선 흥미로운 법 하나가 의회의 문턱을 넘었다. 공화당 의원 30여명이 반대표를 던지긴 했지만, 당시 의회의 분열상을 감안하면 사뿐한 통과였다. 

그 법의 명칭은 Plain Writing Act, 일명 ‘쉽게 쓰기 법’이었는데, 백악관이 발표한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았다. “… 이 법은 수많은 주 정부가 문서를 작성할 때 명확하면서도 평범한 언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언뜻 추상적인 이 법은 백악관이 밝힌 용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회보장국은 수혜자에게 혜택의 정보를 담은 편지를 쓸 때 쉬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국세청(IRS)은 평이한 언어로 세금 양식을 작성해야 한다(The Social Security Admini stration will be required to use plain language in letters that provide bene ficiaries information about Social Security. The IRS will be required to write tax forms in plain language.)” 

# ‘쉽게 쓰기’란 법

이런 뜻이라면 법의 취지를 공감할 만하다. 한데, ‘쉽게 쓰기’를 굳이 법적 영역에 들여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 또한 ‘미국식 디테일’의 전형으로 봐야 할까. 아니다. 흥미롭게도 ‘쉽게 쓰기 법’은 경제 영역과 맞닿아 있다.

이 법을 발의한 브루스 브레일리 하원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 평범한 언어로 문서를 작성하면 정부의 책임이 커진다. 아울러 미국 시민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혹자는 ‘글 하나 쉽게 썼다고 비용이 절감된다는 건 비약’이라고 꼬집을지 모른다. 하지만 브레일리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통계는 숱하다. 사례 하나를 보자. 인디애나대 켈리경영대학원의 연구진은 미 해군이 작성한 메모와 그것을 평범한 언어로 바꾼 메모의 ‘리딩 타임(Reading Time)’을 각각 분석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후자의 메모를 전자보다 17~23% 빨리 읽었다.

이를 토대로 연구진은 켈리경영대학원이 발행하는 저널 「비즈니스 호라이즌스(Business Horizons)」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실었다. “해군의 장교들이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면 읽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데,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 2700만~7300만 달러(1991년 기준)에 이른다.” 그렇다면 ‘쉽게 쓰기 법’은 오로지 경제적 효과만 유발하는 걸까. 그렇진 않다. 이번엔 사회적 효과를 분석해 보자. 

지난해 가상자산시장을 흔든 ‘루나 코인 사태’는 엔지니어만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용어가 원인을 제공했다. [사진=뉴시스]
지난해 가상자산시장을 흔든 ‘루나 코인 사태’는 엔지니어만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용어가 원인을 제공했다. [사진=뉴시스]

# 어려운 언어의 위험성 

‘쉽게 쓰기 법’에 서명한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지만, 신선한 물결을 일으킨 건 정부가 아니다. 시초는 1960년대 미국 소비자단체들이 전개한 ‘쉬운 영어 운동(Plain English movement)’이다. 난해한 계약서로 손해를 입은 시민들이 주州 정부에 개선을 요구한 게 단초가 됐다. 

이 운동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것도 정부가 아니다. 다름 아닌 씨티은행이다. 1970년대 씨티은행이 도입한 ‘고객 친화적 은행 어음 서식’이 소비자들의 공감을 얻자, ‘쉬운 영어 사용을 법제화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런 사례는 ‘쉽게 쓰기 법’의 근간과 목적이 단순히 비용 절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시사한다. 미 정부와 사회는 ‘쉬운 영어 운동’과 ‘쉽게 쓰기 법’을 통해 시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역할을 ‘쉬운 언어’에 부여했다.

이를 역으로 돌리면, ‘어려운 언어’가 그만큼 시민의 권익을 해쳐왔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어려운 언어는 공평하지 않다. 언어의 맥락을 꿰뚫은 이는 이득을, 언어의 행간을 모르는 이는 피해를 입는다. 오늘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 기술공학의 붕괴 

시계추를 2019년으로 돌려보자. 그해 8월 한국 사회는 ‘해외 금리연계형 파생상품(DLS·DLF)’이란 낯선 이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3000명이 넘는 피해자가 7000억원대 규모의 피해를 입었는데, 개중엔 평생 모은 돈을 잃은 은퇴자와 주부도 있었다.

DLS·DLF는 기초자산이 만기까지 기준치 이상을 유지하면 수익을 얻지만, 그 아래로 내려가면 원금을 잃을 수 있는 복잡한 상품이었다. 그런데도 금융회사들은 난해한 용어로 가득 찬 투자계약서를 들이민 채 ‘말만 복잡하지 웬만하면 원금을 잃지 않는 상품’이라면서 투자자를 유혹했다. 물론 결과는 정반대였다.
 
지난해 5월 가상자산시장을 혼돈의 늪에 빠뜨린 ‘루나 코인 사태’도 마찬가지다. 가상화폐 루나를 발행한 테라폼랩스는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 ‘페깅(Pegging·가상화폐 가격을 법정화폐와 연동)’ 등 난해한 기술공학적 개념을 제시하면서 투자자를 홀렸지만, 그 끝엔 패닉과 붕괴만 남았다. 

문제는 이런 ‘어려운 언어’의 위험성이 대형사건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란 점이다. 좁은 골목 속 애먼 서민도 어려운 언어라는 ‘칼끝’ 앞에 설 수 있다. ‘소규모주택 정비사업’이 진행 중인 서울 강북구 미아동 767-51 일대(미아3구역)의 골목에선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21년 대선 후보 시절 서울 미아동 주택 재건축 정비구역에 찾아간 윤석열 대통령. [사진=뉴시스]
2021년 대선 후보 시절 서울 미아동 주택 재건축 정비구역에 찾아간 윤석열 대통령. [사진=뉴시스]

# 어느 마을서 벌어진 일

먼저 소규모주택 정비사업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이 사업은 대부분 1만㎡(약 3025평) 미만의 지역에서 진행한다. 수만㎡ 지역에서 추진하는 대규모 정비사업보다 훨씬 작다는 의미에서 ‘소규모’란 타이틀이 붙었다.

사업 규모가 작은 만큼 절차도 간단하다. 대규모 정비사업에선 필수 절차인 정비계획 수립, 주민설명회 등을 거칠 필요가 없다. 조합설립 인가만 득하면 사실상 끝이다. 이 때문에 소규모주택 정비구역에 포함된 주민들은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쉽지 않다. 주민들이 정비계획을 확인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사업의 근거법엔 난해한 법률용어가 가득하다. 사업을 설명해 놓은 지자체의 안내책자는 ‘이해하기 힘든 행정용어’로 채워져 있다. 언급했듯, 주민설명회를 개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집이 어떻게 바뀌는지’ 조감도를 그려주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정비사업을 담당하는 업체가 늘어놓는 ‘사탕발림’에 현혹되는 주민이 차고 넘칠 수밖에 없다. 서울시 미아3구역에서 진행 중인 ‘소규모 주택정비사업’이 소송으로 얼룩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만난 미아3구역의 원주민은 이런 말을 남겼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어요. 사업을 설명한 자료는 어렵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동네가 좋아지는 일’이란 업체 직원들의 말만 믿고, 조합에 가입했죠. 그런데 막상 조합에 가입하니까 말이 달라지더라고요. 정비사업을 막으려 했지만 현행법상 철회가 불가능했고요. 지금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참조: 커버 파트➊~파트➌] 

# 원고지 한장과 한 문장   

2011년 4월 캐스 선스타인 미 정보규제 사무국장은 ‘쉽게 쓰기 법’의 새로운 지침을 시행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연방기관은 너무나 자주 혼란스럽고 기술적이며 약어로 채워진 언어를 사용한다. 이런 언어로 인해 소비자와 기업가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평이한 언어로 문서를 작성하면 커다란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쉽게 쓰기 법’에 서명한 이유다.”

정부·지자체 자료, 공소장, 판결문 등의 용어는 지나치게 어렵고, 친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대검찰청 시무식 모습. [사진=뉴시스]
정부·지자체 자료, 공소장, 판결문 등의 용어는 지나치게 어렵고, 친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대검찰청 시무식 모습. [사진=뉴시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13년 전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우린 ‘큰 차이’를 만들어낼 작업을 하고 있을까. 나름 순화작업을 했다곤 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공적 영역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여전히 ‘관官스럽다’. 법적 관계를 설정해 놓은 계약서는 그게 뭐든 불편하다. 이뿐인가. 국민의 죄를 묻거나 상호 권리관계를 결정하는 공소장(검찰)과 판결문(법원)은 불친절한 글의 표본이다. 

어느 정도인지 한번 살펴보자. “… 형법상 방조행위는 정범이 범행을 한다는 점을 알면서 그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직접·간접의 행위를 말하므로, 방조범은 정범의 실행을 방조한다는 이른바 방조의 고의와 정범의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인 점에 대한 정범의 고의가 있어야 하나, 방조범에서 정범의 고의는 정범에 의하여 실현되는 범죄의 구체적 내용을 인식할 것을 요하는 것은 아니고 미필적 인식 또는 예견으로 족하다….” 

사례로 소개한 이 판결문의 분량은 원고지 1.1장이고, 글자수는 213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문장이다. 제아무리 문해력이 탁월한 이라도 이 판결문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는 쉬운 언어를 ‘시민의 권리’라고 칭했다(Plain Language is a civil right). 우리의 권리는 어디쯤 와있을까.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김다린·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 527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은 1월 9일 발간하는 더스쿠프 커버 총론입니다. 이어지는 기사  「속도전에 매몰된 신뢰 … ‘미니 재건축’의 비명」 등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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