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진실 덮을 수 없는 SNS 시대의 함의
절대적 사과의 시대와 리더의 책임
진심 어린 사과는 타이밍도 중요해
카카오‧SPC 등 뒤늦은 사과 뭇매
고개 숙이지 않는 이태원 참사 책임자
한국수자원공사 사과는커녕 진실 은폐

다국적 에너지기업 BP 전 CEO 토니 헤이워드는 대규모 기름 유출 사건(2010년)이 발생했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다국적 에너지기업 BP 전 CEO 토니 헤이워드는 대규모 기름 유출 사건(2010년)이 발생했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성난 여론과 심판대 

‘쾅~’. 굉음과 함께 석유 파이프에 구멍이 뚫렸다. 유정油井은 순식간에 파괴됐다. 넓어진 틈새로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 바다엔 거대한 ‘검은 띠’가 둘렸다. 2010년 4월 멕시코만에서 벌어진 석유시추장비 ‘딥워터 호라이즌(Deepwater Horizon)’ 침몰 사태는 이렇게 시작됐다. 

세상의 눈은 이 장비를 운영하던 다국적 에너지기업 BP에 쏠렸다. 이 회사의 CEO 토니 헤이워드는 성난 여론에 밀려 대중의 심판대에 섰다. 

# 최소한의 사과  

재앙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검은 바다’로 돌변한 멕시코만에선 복구 작업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런데도 CEO 헤이워드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건네긴커녕 ‘별일 아니라는’ 듯한 발언을 늘어놔 성난 민심에 더 큰불을 질렀다.

침몰 사태가 터진 지 한달여 만인 5월 14일 영국 가디언 기자를 만난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멕시코만은 매우 큰 바다예요. 우리가 쏟아낸 기름은 전체 물의 양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준이죠.”  그로부터 4일 후인 18일에도 그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자 앞에서 철없는 말을 쏟아냈다. 그 유명한 ‘잠’ 발언이었다. 

기자 : “기름 유출 참사로 밤에 잠을 잘 수 있었습니까?(Were you able to sleep at night in light of the oil spill’s disastrous effects?)”

헤이워드 : “물론이죠. 당연히 잠을 잘 수 있습니다(Of course I can).” 

헤이워드에게 사과는 ‘당연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는 시종일관 최소한의 사과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세상과 여론은 등을 돌렸고, BP를 향한 반감은 급속도로 커졌다. 훗날 헤이워드와 BP는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 절대적 사과의 시대 

사과謝過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
 

이쯤에서 관점을 사과의 정의定意로 돌려보자. 사과는 단순히 ‘미안함’을 전달하는 형식적 행동이 아니다. 사과의 전제는 인정이고, 본질은 용서를 구하는 거다. 사과를 했다는 건 그래서 ‘옳고 그름(正否)’을 따져본 뒤 잘못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수십년 전만 해도 사과는 리더의 덕목이 아니었다. 과실과 잘못은 덮으면 그만이었다. 몇몇 창구만 통제하면 진실이나 사실은 새어나갈 틈이 없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인터넷과 SNS의 전파력은 ‘진실을 덮는 속도’를 압도한다. 실시간으로 기록된 진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세상에 퍼져나간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하물며 유튜브든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금을 ‘절대적 사과의 시대’라 정의하고(로버트 마이어 와튼스쿨 교수), 또 누군가는 ‘대중의 자비에 몸을 던지며 용서를 구해야 하는 시대(아메리쿠스 리드 와튼스쿨 교수)’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진실을 앞세운 사과가 언제나 유효한 건 아니다. 사과엔 또다른 전제가 있다. 다름 아닌 타이밍이다.

지난 19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시민분향소를 방문한 한덕수 총리는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가지고 오라”는 유족의 항의에 “네, 수고하세요”라는 말만 남긴 채 돌아섰다(사진 왼쪽). SPC그룹 허영인 회장, 황재복 사장 등 고위 관계자는 노동자 사망사고 후 뒤늦게 사과절차를 밟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진=뉴시스]  
지난 19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시민분향소를 방문한 한덕수 총리는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가지고 오라”는 유족의 항의에 “네, 수고하세요”라는 말만 남긴 채 돌아섰다(사진 왼쪽). SPC그룹 허영인 회장, 황재복 사장 등 고위 관계자는 노동자 사망사고 후 뒤늦게 사과절차를 밟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진=뉴시스]  

# 리더의 덕목과 타이밍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Apartheid)에 맞섰던 데즈먼드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의 예를 들어보자.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즈먼드 투투는 반대편을 향한 응징과 복수를 배격했다. 차별과 전쟁의 시대를 끝내려면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런 그가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 중 하나로 뽑은 건 흥미롭게도 타이밍이었다. “진짜 리더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언제 양보해야 하는지, 언제 타협해야 하는지, 언제 전투에서 지는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The real leader knows when to make concessions, when to compromise, when to employ the art of losing the battle in order to win the war·하버드비즈니스리뷰 2007년 1월호).”

데즈먼드의 관점에서 보면, 적절한 타이밍에 이뤄지는 사과야말로 갈등이나 사태를 수습하는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다. 반면, 뒤늦은 사과는 오해를 빚거나 더 큰 화를 부르곤 한다.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경우도 숱하다. 씁쓸하게도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런 사례는 멀리 있지 않다. 

노동자 사망 사고가 터진 지 6일이 지난 뒤에야 수장(허영인 회장)이 고개를 숙인 SPC는 불매운동이란 역풍을 맞았다. ‘서비스 먹통 사태’ 이후 6시간이나 흘러서야 사과문을 내놓은 카카오는 진정성과 신뢰성에 흠집이 났다. 이태원 참사는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참사가 터진 지 사흘이 지나서야 고개를 숙인 책임자들, 그보다 더 늦게 사과의 뜻을 밝힌 집권자를 향한 민심은 싸늘하기만 하다. 

문제는 잘못을 범하고도 사과는커녕 은폐를 시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공기업 ‘한국수자원공사(수공)’의 일이다. 

# 수공의 은밀한 제안 

시계추를 10월 24일로 돌려보자. 그날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과 호계동 일대 수도꼭지에선 공업용수가 흘러나왔다. 깨끗한 수돗물이 아닌 흙탕물이었다. 아파트 2126세대, 상가·다가구주택 170세대, 학교 5곳, 어린이집 1곳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흙탕물을 흘려보낸 수공은 안양시에 흙탕물이 발생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안양교도소 주변 공업용수 수도관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시공사가 문제의 수도관을 파손했다. 이 때문에 갈산동과 호계동 일대에 흙탕물이 유입됐다….” 

수공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안양시는 ‘복구공사 중 수도관이 파손됐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수많은 미디어가 이를 그대로 받아 전파했다. 피해를 입은 지역주민들도 흙탕물의 원인이 단순한 ‘수도관 파손’ 때문인 것으로 이해했다.

대전 대덕구 한국수자원공사를 방문해 물관리시스템을 점검하고 있는 한화진 환경부 장관과 박재현 수공 사장. 환경부는 수공의 주무관청이다. [사진 | 뉴시스, 자료 | 더스쿠프] 
대전 대덕구 한국수자원공사를 방문해 물관리시스템을 점검하고 있는 한화진 환경부 장관과 박재현 수공 사장. 환경부는 수공의 주무관청이다. [사진 | 뉴시스, 자료 | 더스쿠프] 

하지만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흙탕물의 진짜 원인은 ‘오접誤接’이었다. 수공이 공업용수관을 생활용수관에 ‘잘못 연결’한 탓에 흙탕물이 안양시내로 흘러들어간 거였다. 수공이 지역주민에게 사과를 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과실을 ‘단순한 실수’로 둔갑시켰다는 얘기다. 

도덕성을 잃은 수공의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의 취재가 본격화하자 수공은 “주민들과의 보상 합의가 끝날 때까지 보도를 미뤄달라”며 모종의 거래를 제안했다. 주민들이 수공의 과실을 알아채기 전에 서둘러 보상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자신들의 과실을 수습할 대책으로 ‘은밀한 공모’를 제시한 셈이었다.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다. 

# 해소되지 않은 질문 

자! 논점을 다시 돌려 첫 질문의 답을 살펴보자. 2010년 7월 15일 BP는 400만 배럴의 석유를 바다에 쏟아낸 유전을 최종 폐쇄했다. 작업자 11명이 사망한 뒤 내려진 때늦은 조치였다.

그로부터 12일이 지난 7월 27일 BP는 CEO 헤이워드의 경질을 발표했다. 그후 헤이워드는 오바마 대통령이 설치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호된 질타를 받아야 했다.  

이 지점에서 우린 물어봐야 할 게 있다. 사과의 타이밍을 놓친 SPC와 카카오,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은 탓에 정쟁의 빌미를 제공한 이태원 참사의 책임자는 헤어워드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진실을 알리지 않고 잘못을 은폐한 수공의 미래는 헤이워드와 다를 것인가. 사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놓인 불편한 질문들이다.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 525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은 12월 26일 발간하는 더스쿠프 스페셜 총론입니다. 이어지는 기사  「안양시 흙탕물 유입 사태 진실」 「레고랜드, 먹통, 참사 … 2022년 그때 그 사태 후와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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