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더 격화한 여야 정치권 다툼
혐오로 점철된 민망한 싸움
편싸움에 사라진 민생법안들
국회서 잠자는 민생법안 수두룩
‘만델라 리더십’ 누가 발휘할까

여야 정치권의 대립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사진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 회의 모습.[사진=뉴시스]
여야 정치권의 대립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사진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 회의 모습.[사진=뉴시스]

# 만델라의 선택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그는 분노를 품지 않았다. 뼈아픈 옥고를 치렀지만 못된 간수를 용서했다. 백인들이 수십년간 사선死線으로 몰아세웠음에도 “(나와) 백인의 공통점을 찾았다”면서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쯤 되면 많은 이들이 한 사람을 떠올릴 게다. 그래, 맞다. 남아공 최초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얘기다. 

# 담대한 화해 

화해와 타협. 만델라는 이 추상적인 대명제를 위해 삶을 바쳤다. 그의 붉은 마음(丹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를 부통령에 발탁했던 일이다. 

직전 대통령이었던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와 손잡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Apartheid)를 종식해 노벨평화상(1993년)을 공동수상했지만, 숱한 논쟁거리도 남겼다. 자신의 통치기간에 자행된 ‘인권 유린’ 논란 앞에선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1994년 남아공 첫 민선을 앞두고 ‘흑인 간 유혈사태’가 터졌을 땐 “데 클레르크 당신이 조장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받았다. 

몇몇 흑인 인사는 이런 이유를 들어 ‘노(No) 데 클레르크’를 외쳤다. 만델라는 뜻을 꺾지 않았다. “남아공을 백인과 흑인이 어울려 사는 다민족 국가로 만들겠다”는 대의를 위해서였다. 국내 미디어들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만델라의 담대한 화해’라고 표현했다. 묘사가 그럴듯했는지, ‘담대한 화해’란 말은 이때부터 양보와 타협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였다. 

# 담대한과 위대한 

그런데 좀 이상하다. 담대膽大의 사전적 의미는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하다’이다. 만델라가 데 클레르크에게 보낸 화해의 메시지와 담대란 단어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겁 없이 화해를 요청하지 않았다. 한발 물러선 채 화해와 타협을 꾀했다. 대의 앞에 욕심을 접었고, 뜻을 관철했다.

이 때문인지 해외 미디어는 만델라의 결단을 설명할 때 ‘담대한’이 아닌 ‘위대한(Grand)’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영국 미디어 ‘The History Press’의 평가를 살펴보자.

“만델라와 그의 적대자 겸 파트너인 데 클레르크가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은 ‘위대한 역사적 타협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었다(The crucial role played by Mandela, and by his adversary-cum-partner de Klerk, was ‘to market a grand historical compromise’).” 

[자료 | 더스쿠프, 사진 | 뉴시스]
[자료 | 더스쿠프, 사진 | 뉴시스]

# L자형 침체의 덫 

우리가 갑자기 ‘만델라 스토리’를 꺼내든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민생을 뒷방에 던져놓은 채 졸렬한 싸움을 벌이는 정치판을 꼬집기 위해서다. 

관점을 잠깐 민생으로 돌려보자. 말 그대로 힘겨운 3고高 시대다. 고물가는 도통 꺾이지 않고 금리는 연일 치솟는다. 몇 달 전만 해도 7%대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허황된 말처럼 들리더니, 이젠 8%를 넘본다. 

경기라도 활기를 되찾으면 다행이련만, 여러 지표를 보면 기대하기 힘들다. 수출 증가율은 두달 연속 마이너스(10월 –5.7%, 11월 –14.0%)를 기록했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에서 수입으로 지출한 돈을 뺀 무역수지는 8개월 연속 적자 행진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장기 적자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도 바닥을 맴돈다. 2022년 1분기 이후 3분기 연속 0%대다. 4분기엔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잠재성장률은 더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7~2020년 2.8%였던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2020~2030년 1.9%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모두 침체의 덫에 걸렸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김상봉 한성대(경제학) 교수의 비평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GDP 성장률은 뚜렷한 둔화세를 보이고 있다. 2023년은 1%대 성장률에 그칠 게 확실해 보인다. 지금은 일본의 장기불황 때 나타났던 L자형 침체를 우려해야 할 때다. 정부는 섬세한 정책을 사용해야 한다.”

# 편싸움, 사라진 민생 

이럴 때 필요한 게 정치다. 정부와 집권여당은 물론 야권도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판엔 양보도, 화해도, 타협도 없다. 직전 정권에서 시작된 다툼은 현 정부 들어 더 거칠어졌다. ‘드잡이’ 수준의 싸움 방식은 볼썽사납고, 주제는 민망하다. 욕설 파문, 청담동 바 폭로, 예산안 볼모 논란이 정국을 달구더니, 이젠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기간 연장을 두고 정쟁적 충돌을 빚고 있다. 

금배지들이 편싸움을 해대면서 ‘제 일’이라도 하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코로나19 손실보상 확대 법안(21건), 세입자 보호 강화 법안(27건), 청년층 자산 격차 완화 지원 법안(3건) 등 국회 어딘가에서 겨울잠에 들어간 민생법안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여야 모두의 잘못이다.  

만델라는 화해와 타협을 위해서라면 ‘물러섬’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진은 만델라 데이를 기념하고 있는 남아공 학생들. [사진=뉴시스]
만델라는 화해와 타협을 위해서라면 ‘물러섬’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진은 만델라 데이를 기념하고 있는 남아공 학생들. [사진=뉴시스]

# 화해의 점심식사 

역사는 화해와 타협의 산물이고, 그 중심엔 양보가 있다. 먼저 양보하고 물러서야 화해와 타협의 여지가 생긴다. 그래서 리더의 물러섬은 ‘결단의 영역’으로 불린다. 데 클레르크를 부통령으로 발탁한 일이 위대한 역사의 한 토막으로 기록돼 있지만, 만델라는 평소에도 ‘물러섬’을 주저하지 않았다. 

대통령에 오른 뒤 만델라는 흑인을 멸시했던 정치인과 흑인 차별 반대자의 미망인을 초청해 ‘화해의 점심식사’를 하곤 했다. 이 식사에 참여하기 힘든 이가 있다면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만델라가 먼저 대치 국면에서 물러서지 않았다면 두 진영(백인·흑인)의 화해와 타협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민생이 정말 춥다. 2023년 민생의 현장에 ‘봄 제비’가 찾아올지조차 알 수 없다. 주머니가 든든한 고소득층이야 몸을 숨길 언덕이 있을지 몰라도 취약계층은 허허벌판에서 찬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다. 어떤가. 이쯤 되면 누군가는 한발 물러나 화해와 타협을 시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덧없이… 만델라를 그려본다.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강서구·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참고: 이 기사는 더스쿠프 매거진 519호 기사를 근거로 재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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