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전시회 | 온 페이퍼 on paper
PKM갤러리 매력 다시 보여준 전시
종이 매개로 한 작가 15명 40여점 소개

Suh Seung-Won, Simultaneity 22-1018, 2022.[사진=PKM갤러리 제공]
Suh Seung-Won, Simultaneity 22-1018, 2022.[사진=PKM갤러리 제공]

다소 보수적인 미술계에선 갤러리 간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A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연 작가와 B갤러에서 작품전을 진행한 작가를 두고 이런저런 상반된 말이 나도는 식이다. 

물론 이런 유형의 뒷말은 작가들이 아닌 기획자 사이에서 많이 흘러나온다. 최소한 작가들은 통찰의 깊이를 논할지언정 예술을 만들어내는 영혼을 부인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PKM갤러리는 필자에게 신선함을 줬다.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게 소통할 만한 공간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어서다. 

실제로 PKM갤러리는 아이디어가 좋다. 특정 작가의 소개를 그림뿐만 아니라 책으로도 선보이는 건 이들의 탁월한 기획력의 산물이다. 2022년 12월 7일부터 2023년 1월 7일까지 진행한 ‘온 페이퍼 on paper’전展은 PKM갤러리의 매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전시라고 생각한다. 먼저 PKM이 왜 ‘종이’를 화두로 내세웠는지부터 살펴보자.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이후 종이는 지식이 대중화하는 데 중대한 발판 역할을 했다. 최근엔 디지털 인증체계를 도입하는 곳이 많지만, 결국 이는 종이에 기반한 사회시스템을 ‘디지타이징(digitizing)’하는 과정으로 풀이할 수 있다.[※참고: 디지타이징은 아날로그 상태의 신호를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는 샘플링, 모듈레이팅 등을 통칭하는 용어다.] 

예술의 관점에서도 종이의 의미와 역사성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종이는 다양한 재료와 색채를 담을 수 있는 시각예술계의 근간이다. 종이는 흑연·색연필·수채·유채 등 각종의 안료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중립적인 매체여서다. 미술가들은 이렇게 열려 있는 종이에 다양한 작업을 시도해 왔다. 작가들은 어쩌면 새 아이디어가 샘솟는 순간과 생각이 진화하는 과정을 종이에 붙잡아 두려 했을지 모르겠다.

Yun Hyong-keun, Drawing, 1981.[사진=PKM갤러리 제공]
Yun Hyong-keun, Drawing, 1981.[사진=PKM갤러리 제공]

이런 점에서 PKM갤러리의 ‘온 페이퍼 on paper’전은 흥미롭다. PKM갤러리는 이 전시를 통해 작가 15명의 작업 40여점을 소개했는데, 갤러리 측은 종이를 매개로 작가들에게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한 듯하다. 한명씩 살펴보자. 

고故 윤형근 작가의 작품은 스케치북, 모눈종이, 책의 낱장 등 일상의 소재를 그린 습작이 하나의 ‘조형 언어’로 확립해 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드러냈다. 서승원 작가는 햇볕이 창호지에 어슴푸레 투과하듯 색과 빛이 은근하게 진동하는 ‘동시성’ 종이 연작을 소개했다. 분홍의 색상이 참 예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구현모 작가는 작업실 마당의 고욤나무 외피에서 얻은 소재를 활용한 프로타주(frot tage)와 포장 판지의 패턴을 내용물로 삼은 조각을 만들어냈다. [※참고: 프로타주는 회화에서 그림물감을 화면에 비벼 문지르는 채색법을 말한다.] 이상남 작가는 도시 문명의 리드미컬하면서도 나름의 균형감을 갖고 있는 조형 기호들을 종이 위에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언급한 작품만이 ‘종이’와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종이를 테마로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작품감상자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이는 어쩌면 전시 기획자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는 전시타이틀에 특유의 분위기를 넣기 위해 고심한 듯하다. 전시타이틀을 대문자 하나 없이 소문자(on paper)로만 담담하게 만든 건 이를 방증한다. 

Koo Hyunmo, 고욤나무 Diospyros lotus, 2022.[사진=PKM갤러리 제공]
Koo Hyunmo, 고욤나무 Diospyros lotus, 2022.[사진=PKM갤러리 제공]

아쉽게도 전시가 지나서 현장 방문이 불가능하지만 PKM갤러리의 온라인관에선 관람이 가능하다. 차분하고 깨끗한 정신으로 신년의 계획을 설계하고자 하는 이라면 온라인 전시를 관람해 보길 추천한다.

김선곤 더스쿠프 미술전문기자
sungon-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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