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⓬
정책이나 비전 사라진 정치권
여당 당 대표 선거 점입가경
괸심은 첫째도, 둘째도 윤심

위기의 순간, 지도자에게 필요한 건 결단력이다. 위기를 돌파할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지도자의 몫이다. 이런 결단을 위해 필요한 건 측근의 바른 목소리다. 쓴소리를 하는 측근이 많을수록 그 지도자는 합리적인 결단을 내릴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옳은 소리를 늘어놓는 측근을 옆에 두려는 지도자는 많지 않다. 조선시대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듯하다. 

집권여당 대표를 뽑는 과정에서 ‘윤심’이 너무 많이 언급된다.[사진=뉴시스]
집권여당 대표를 뽑는 과정에서 ‘윤심’이 너무 많이 언급된다.[사진=뉴시스]

조정에서 권력싸움을 벌이든 말든, 순신은 제2호 거북선 건조를 밀어붙였다. 한편으론 그동안 수집했던 전쟁의 여러 전조 현상을 정리했다. “동풍이 크게 분 뒤 배 짓는 나뭇조각이 해안에 떠밀려 왔다. 왜구에 끌려갔던 어민뿐만 아니라 백성들조차 왜국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며 걱정한다. 풍신수길은 남과 겨뤄 이기기를 좋아해 정녕코 이웃나라를 범할 것이다.”

순신은 이를 근거로 “바다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수군밖에 없사오니, 국방의 대책은 수군, 육군 어느 한쪽도 폐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란 내용의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서인 측이 원하는 대로 ‘육군에만 전력하고 수군을 파한다’는 교서를 내리려고 하던 차에 순신의 장계를 받은 선조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대략 난감했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구나.”

선조는 수군 혁파를 주장하던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 보시오. 이순신이 올린 장계의 필법이 꽤 수려하지 않소?” 상소문을 흔들어 보이며 생뚱맞게 순신의 필체를 칭찬하는 선조의 모습에 모두들 어리둥절해하며 웅성거렸다. 이 틈을 파고들어 선조는 그 자리에서 비지批旨(상소에 임금이 내리는 답)를 내렸다. 대신들은 한마디 의견도 꺼내지 못한 채 “신립의 계본에는 윤허하지 않겠소”란 선조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신립의 ‘수군혁파안’은 순신의 ‘수륙병존안’에 밀려났다.

다만 ‘거북선 20척 건조계획’은 뜻을 펴지 못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잔머리를 굴리던 선조가 순신의 손을 반만 들어준 까닭이었다. 조정의 고위 공직자들이 ‘군비를 할까 말까’ ‘수군을 둘까 말까’ 질펀한 개싸움을 일삼는 동안 왜군은 조선침략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1592년(임진년) 4월 12일. 거북선 진수식을 마무리한 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썼다. “맑음. 식사를 마친 뒤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에 나가서 활 10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가면서 노대석을 살펴봤다.”

아픈 몸이었지만 순신은 군인이자, 장군이자, 고위 공직자로서 자신의 책무인 ‘전쟁 준비’로 하루를 보냈다. 바로 이날, 왜군함대 700여척(부산 절영도 90척, 부산포 350척 등)이 15만 대군을 싣고 부산항 앞바다에 다다랐다. 

이튿날인 4월 13일 새벽에 왜군의 선봉 소서행장이 육지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바야흐로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무려 700여척이나 되는 대규모 함대가 국경 관문을 침입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조선군은 아무런 방어책을 쓰지 못했다. 당시 조정의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의 결과물이었다.

거북선이 완성되기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틈만 나면 노략질로 조선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왜구의 섬나라가 통일되면서 중앙집권화가 이뤄졌다는 소식이 조선에까지 퍼졌다. 그러자 선조는 나름대로 정보 수집에 나섰고, 순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부하들의 보고에 풍신수길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고 나섰다.

풍신수길이 과연 조선을 침략할지 그 속내를 들여봐야만 했던 조정은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조는 1590년 3월 6일 서인 대표로 황윤길을, 동인 대표로는 김성일을 앞세워 공식 사절단인 ‘조선통신사’를 섬나라에 파견했다. 이듬해 봄, 선조는 통신사가 귀국하면서 받아온 풍신수길의 서신을 펼쳐봤다. “일본국 관백(풍신수길)은 조선 국왕 전하의 글을 받들어 재삼 숙독하였습니다”는 말로 시작된 서신엔 풍신수길의 야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는 이미 천하를 크게 다스려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니 일본이 개벽한 이래로 오늘날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생애가 100세를 넘기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곧장 명나라에 뛰어들어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400여주를 바꿔놓고 황제의 정치와 교화를 1억만년 동안 시행하고자 하니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다면, 제가 명나라에 들어가는 날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을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삼국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중하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수길은 받들어 답서합니다.”

자! 어떻게 읽히는가. 누가 보더라도 선전포고다. 하지만 선조는 이 글을 읽고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에게 필요한 건 결단이다. 그 결단을 돕는 건 다름 아닌 측근들의 목소리다. 진짜 리더라면 자신의 옆에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둬야 하는 이유다. 

집권여당 당 대표 선거가 점입가경이다. 정책이나 미래 비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첫째도 윤심(윤석열 대통령 마음), 둘째도 윤심이다. 양강 중 한명은 경쟁자를 향해 “대통령이 신뢰할지 의문”이란 말을 던진다. 다른 한명은 “윤심이나 팔고 있다”면서 일갈한다.

‘윤심’이 뭐 그리 대단한지는 알 수 없지만, 대통령 옆에 제대로 된 측근이 있다면 ‘윤심 논쟁’을 벌써 잠재웠을 거다. 하지만 윤핵관이라 불리는 측근들은 지금 ‘윤심 팔이’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통령이 선조처럼 민심을 반영하지 않은 ‘엉뚱한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 윤핵관에겐 들리지 않는가. 

다시 선조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지만 선조는 주저하면서 상사上使였던 황윤길에게 풍신수길이 어떤 인물인지 물어봤다. “그의 눈에 광채가 있어 형형하고 위인이 비범하니 필연코 해외로 출병하여, 조선을 침범할 우려가 있나이다.”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믿고 군비를 일으키자고 하려다 부사副使 김성일에게도 물었다. 김성일은 “수길은 눈이 쥐눈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것 없나이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결정을 망설여서인지 회피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선조는 여러 대신에게 판단을 맡겼다. 그랬더니 대부분 김성일의 말을 받들었고, 대세는 ‘군비는 염두에 두지 말자’였다. 

선조는 결국 동인 측 김성일의 손을 들어줬다. 백성의 안위를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최고 지도자였지만 뼈아픈 판단 실책을 저질렀다. “왜국이 대국인 명나라를 친다는 것은 가재가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려 함이요, 벌이 거북의 등을 쏘려 하는 셈이로다.” 이런 생각으로 선조는 왜국의 이런 사정을 명나라 조정에 통지하고자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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