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⓭
여러 의견 경청하는 건 순리지만
결정의 순간에 망설이면 안 돼
결정의 책임은 지도자가 져야
불체포특권 선택한 야당 대표
이탈표 나오면서 명분도 잃어

거대 야당 대표가 ‘불체포특권’을 누렸다.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당당하게 영장실질심사를 받아라’란 말이 나왔지만, 야당 대표는 따르지 않았다. 이 선택이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진 알 수 없다. 어차피 지도자의 선택은 후대가 평가하는 법이다. 

이재명 대표는 검찰의 행보를 ‘정치보복’이라고 규정했다.[사진=뉴시스]
이재명 대표는 검찰의 행보를 ‘정치보복’이라고 규정했다.[사진=뉴시스]

1590년 3월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의 의견은 엇갈렸다. 서인 쪽 황윤길은 ‘풍신수길’이 도발할 것이란 의견을 피력한 반면, 동인 측 김성일은 일본의 새로운 수장 풍신수길은 위협적이지 않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좌고우면하던 선조는 결국 김성일의 손을 들어줬다. “왜국이 대국인 명나라를 친다는 것은 가재가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려 함이요, 벌이 거북의 등을 쏘려 하는 셈이로다.” 이런 생각으로 선조는 왜국의 이런 사정을 명나라 조정에 통지하고자 했다. 

그러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반대하고 나섰다. “명나라는 왜국이 이렇게 패망한 글을 조선에 보낸 이유가 조선과 왜국 중개상들이 중국 몰래 왕래했기 때문이라며, 오히려 우리를 의심할 소지가 있나이다. 또 무슨 모함과 견책이 있을는지도 모르니 오늘의 일은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하옵니다.” 우의정 이양원李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도 이산해의 말에 동조했다. 

이때 좌의정 류성룡은 선조의 뜻에 찬성해 ‘명나라에 통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일본 국서를 보고 중국에 알리지 않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 일본이 중국을 침범할 책모가 있다는 사실을 다른 나라인 유구琉球(류큐)로부터 듣는다 하면,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였다는 대명국大明國의 의심은 더욱 깊어질 게 뻔합니다.” 

선조는 류성룡과 대사헌 윤두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김응남을 상사上使로 삼은 사신을 명나라에 보냈다. 이때만 해도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돼 중국을 침범할 것’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왜국이 명나라를 넘본다”는 선조의 국서를 보고서야 유언비어는 수그러들었다.

반면 조선 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일본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으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도 나름의 준비는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국형을 충청감사로 발령해 도내의 성곽을 수리하는 한편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을 시켰다. 또 신립, 권율, 정발鄭撥 등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순신도 이때 전라좌수사로 임명됐다. 하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은 무능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선조는 중대한 사안에서도 결정을 내리길 주저했다. 무릇 지도자라면 결정의 순간에 망설이면 안 된다. 여러 의견을 경청하는 건 순리지만, 어차피 결정은 지도자의 몫이다. 그 결정이 옳았는지 그릇됐는지는 역사가 판단하기 때문에 그 결정의 책임을 지도자가 지면 그만이다.

거대 야당 대표가 사실상 불체포특권을 누렸다. 다른 야당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인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숨길 게 없었다면 영장실질심사란 절차를 정면돌파하는 게 어땠을까’란 아쉬움을 내비친다. 그의 말대로 검찰의 주장이 소설이고 허무맹랑한 것이라면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발부할 이유가 없어서다.

이런 의견을 대변하듯, 지난 2월 27일 이뤄진 국회 체포동의한 표결에선 ▲가결 139표 ▲부결 138표 ▲기권 9표 ▲무효표 11표라는 뜻밖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야당에서 무더기 ‘이탈표’가 나온 셈이다. 어쨌거나 이 문제는 역사가 평가할 일이다. 선조의 선택을 두고 후대 사람들이 날선 비판을 제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뉴시스, 자료|더스쿠프]
[사진|뉴시스, 자료|더스쿠프]

이제 임진왜란 이야기를 해보자.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이틀 후인 1592년 4월 15일. 해가 질 무렵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수사 김수가 일제히 “왜군이 부산 앞바다로 몰려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공문을 순신에게 보내왔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전진하면서 부산진은 하루 만에 함락됐다.

그 무렵, 부산첨사 정발은 절영도로 사냥에 나섰다가 다음날 아침 왜군의 상륙 소식을 들었다. 급히 부산성으로 달려가 성 위에서 바다를 바라봤다. 요상한 갑옷에 투구를 쓴 왜군이 조총과 창검 깃발을 들고 쳐들어왔다. 해마다 한번씩 일본 배들이 장사하러 오는 전례가 있었지만 그것은 아닌 듯했다.


정발은 ‘일검보국(한자루의 칼로 나라에 보답한다)’이라고 새긴 칼을 차고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했다. 군관들도 방위태세를 갖추고 독약을 바른 화살을 전통에 가득 넣어 메었다. 일본군이 풍진을 날리며 부산산성을 향해 소낙비처럼 몰려왔다.

왜군 대열 중간쯤에는 뿔이 달린 투구를 쓴 대장이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일본 선봉 소서행장이었다. 일본군은 한바탕 맹렬히 싸운 뒤 물러갔다. 정발은 적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얕보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소서행장이 물러간 건 나름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성의 방비가 견고하고 군사가 용감한 것을 보고 거짓으로 물러나 정발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하자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정발은 그날밤 술에 취해 단잠에 빠졌다. 정발과 함께 술을 먹은 부하들도 자는 사람이 늘어났다. 밤 축시쯤 소서행장은 부산의 지리를 잘 아는 왜호(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를 앞잡이를 세워 부산성을 에워쌌다.

새벽에 참호의 얕은 곳을 건너가 사다리를 놓고 부산성을 넘어 들어갔다. 아군의 장졸들이 불의의 습격에 놀라 깨었지만, 상황은 아비규환 자체였다. 총에 맞아 죽거나 밟혀 죽었다. 쌓인 주검이 산더미를 방불케 했다. 나중에는 조선 장졸들도 정신을 차려 응전했지만 무너진 형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도 싸우기 벅찬 상대였다. 일본군의 조총은 활의 위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먼 거리에서 싸운다면 활이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이번 같은 근거리 싸움에선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왜군은 항복하기를 압박했으나 정발과 부산성에 남은 군사 1000여명은 최후 1인까지 싸우기를 결심하고 용맹하게 맞싸웠다.

하지만 군사들이 차례로 총알에 맞아 거꾸러졌고, 아군의 화살도 다 떨어졌다. 그러자 정발의 비장(지방 장관이나 파견 사신을 주행하던 관원)이었던 정헌, 황운 등이 “사또 이제는 화살도 다 하였으니 피신을 하였다가 다음 기회를 기다림이 어떨지요”라며 물어봤다.


정발은 웃으며 칼을 들고 나섰다. “왕명을 받고 장수가 되어 내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간단 말이냐? 나는 이 성에서 죽어 이 성을 지키는 귀신이 될 터다.”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결의를 보였다. 정발의 비장한 말에 남은 군사들은 “우리도 사또를 따라 이 성의 귀신이 될 테요”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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