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이 흐르던 의주 행재소에 뜻밖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왜군의 진격을 걱정하던 선조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터뜨리면서 “이순신을 정1품에 제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서인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이 동인 류성룡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든 당파싸움이 문제다. 친윤, 반윤, 친명, 반명…, 공교롭게도 지금 정당도 똑같은 상황이다.한산대첩을 이끈 이순신은 패배하고 도망가는 14척의 왜적 함선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날이 저문 데다 군사들도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견
임금은 온종일 명나라의 구원만 기다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나라가 위태롭든 말든 그 생각만 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해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승전을 알아주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지만, 이순신은 그 길을 운명으로 여겼다. 혹여 세상이 그때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진짜 영웅은 역사에 남는다. 지금 우리의 정치인 중엔 ‘역사’에 남을 이가 있을까.제1차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나섰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병을 거느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인터넷에 한산도대첩을 검색하면 진주대첩ㆍ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전투라는 표현도 종종 등장합니다. 이순신의 학익진과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The Battle of Cannae전세계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한산도해전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거의 모든 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투가 있습니다.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과 맞붙었던 ‘칸나에 전투’입니다.전투에서 압승하기 위해선 포위섬멸전이 가장 좋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해도 적군의 주력과 지휘관
배설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명령에 불복종해 최소한의 수군 병력을 지켜냈고, 한산도 통제영에 있던 막대한 군사물자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막아냈습니다. 전란 직후 처형됐지만 6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돼 사면ㆍ복권됐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했고 군인으로서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한산도대첩 : 세계 해전사史의 별이 되다 앞서 명량해전을 말할 때, 이순신의 전투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철저한 정
영화 흥행기록이 경마 경주는 아니지만 김한민 감독의 2014년 작품 ‘명량’은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모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이 기록을 깬다는 것은 어쩐지 상식의 저항마저 불러일으킨다. 세계적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제도는 영원히 나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