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36편
이순신, 장수들 소집하고 작전
장수 각자의 임무와 위치 지정
역사적인 한산대첩 시작의 순간
조정 사람들 알아주지 않았지만
백성 위해 전장 선택한 진짜 리더

임금은 온종일 명나라의 구원만 기다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나라가 위태롭든 말든 그 생각만 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해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승전을 알아주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지만, 이순신은 그 길을 운명으로 여겼다. 혹여 세상이 그때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진짜 영웅은 역사에 남는다. 지금 우리의 정치인 중엔 ‘역사’에 남을 이가 있을까.

영웅을 만드는 건 ‘윗사람’이 아니라 ‘민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웅을 만드는 건 ‘윗사람’이 아니라 ‘민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1차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나섰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의승장 영규의 승군과 합세, 금산에서 제2차 금산전투를 벌였다.

이때에도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沃, 조방장 윤응린尹應麟 등 관군이 연달아 무너졌다. 의승장 영규가 홀로 적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헌, 영규, 700명의 의병 모두 왜군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한양에서 금산까지 내려온 왜군의 1차 목적은 전라도를 장악한 다음 진지를 구축하고 군량미까지 원활하게 조달하자는 것이었다. 최종 목표는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이었다. 적의 수군은 왜국에서 증파된 대규모 함대의 힘을 빌려 그동안 연전연패한 분을 씻기라도 하듯 경상도 연해 각처에서 날뛰고 있었다.

가덕에 적선 10여척, 거제 송진포 앞바다에 적선 30~40척, 남해도의 남단인 금산포錦山浦에는 심지어 적의 탐보선까지 나타났다. 적의 수군 역시 최종 목표는 전라도 해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8도 중 7도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라도마저 적의 손에 들어간다면 조선은 끝장이다. ‘전략적 리더십’은 지휘자나 지도자라면 응당 갖춰야 할 원초적 자질이다. 이게 없으면 나라도 민생도 엉망이 된다.

순신은 선조의 출정 명령이 떨어지기 전부터 제3차 출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3차 출전에는 지난번과는 달리 조선 연합함대를 구성, 합동작전을 펼치기로 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꾸준히 연락을 취해왔다. 이에 따라 이억기의 함대가 7월 4일 여수에 도착했고, 순신은 다음날까지 작전회의를 이어갔다. 

7월 6일 새벽, 경상도 해역으로 출발한 이순신ㆍ이억기 함대는 노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판옥선 7척과 합류했다. 이로써 조선 연합함대의 전력 규모는 전투선인 판옥선을 기준으로 59척이 됐다. 전투선을 보조하는 중선과 소선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120척 규모(기록마다 서로 달라 정확하지 않음)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3개월 만에 조선의 국력은 무참히 무너졌다. 최고 지도자인 선조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은 무능하다 못해 혼이 빠져 있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명나라 조정에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애걸복걸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남쪽 해역의 일개 수군절도사인 순신은 조정에서 알아주지도 아니하는 해전海戰의 길로 떠나고 있었다.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자기의 양어깨에 지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직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열정적인 애국심과 책임감, 이것이 순신으로 하여금 이 길을 떠나게 한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높으신 나리들은 과연 백성을 위한 길을 걷고 있을까. 


연합함대는 7월 6일 창신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고성 지역 미륵도 남서쪽에 위치한 당포에 도착했다. 순신의 함대가 도착하자 산에 숨어 있던 피난민들이 내려와 반겼다. 이때 지역 주민 김천손金千孫이 순신의 숙영지로 찾아왔다. “왜군 함대 70여척이 영등포 앞바다에서 나타났다가 고성 견내량목에 와서 닻을 내렸소.”

요즘처럼 최첨단 군사장비가 없던 시절에 적의 소재와 규모를 먼저 파악한다는 건 군사상으로 중차대한 것이었다. 순신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장수들을 소집하고 작전을 세웠다. 특히, 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각자의 임무와 위치를 지정해주는 한편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지시했다.

첫째, 결코 제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약속한 대로 복종할 것. 둘째, 먼저 득승했다 하여 공을 다투지 말고 제 맡은 직분을 사수할 것. 셋째, 애써 적병의 수급을 베려 하지 말고 많이 싸워 적을 죽이는 데 힘쓸 것. 넷째, 애걸하고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서 대장에게 보고할 것.


순신은 싸울 때마다 수급을 증거로 보이지 않더라도 누가 잘 싸우는지 알 수 있으니, 머리 하나를 베는 동안에 적을 두셋 죽이라는 훈령을 내린 것이다. 7월 8일, 조선 연합함대는 새벽녘의 바다물결을 헤치고 소장군도를 돌아 견내량 쪽으로 접근했다. 역사적인 한산대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조선 함대를 발견한 왜적 수군이 먼저 움직였다. 해적 출신의 다이묘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후방에 있던 사령관 구귀가륭(구키 요시타카)의 명령도 없이 함선 70여선을 몰고 전속력으로 견내량을 향해 다가왔다. ‘이순신을 제거하라’는 풍신수길의 특명을 받은 터라 큰 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5월에 있었던 용인전투에서 대승을 거뒀기에 조선군을 이길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한산도대첩 전 이순신은 연합을 꾀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한산도대첩 전 이순신은 연합을 꾀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적이 돌진하는 모습을 본 경상우수사 원균이 큰 목소리로 “지체하지 말고 우리도 돌진합시다!”라고 소리쳤다. 원균의 이런 모습에 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썼다. “원균은 기본적인 병법조차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순신은 원균의 말을 대꾸 없이 흘려버리고, 광양현감 어영담과 옥포만호 이운룡이 거느린 선봉대 6척만 적을 향해 함포를 쏘며 공격하는 척하다가 도주하도록 지시했다. 견내량은 해협이 좁은 데다 암초가 많은 지형이란 점을 감안한 전략이었다. 협판안치의 함대가 아군 선봉대를 전속력으로 추격하며 한산도의 넓은 앞바다까지 쫓아 나왔다. 순신의 유인작전에 보기 좋게 걸려든 거다. 

사실 조선 함대의 대부분은 이미 순신이 미리 정해준 대로 동서남북에 있는 산그늘과 섬그늘에 숨어 있었다.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통영만 쪽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순신의 계획은 이랬다. “썰물에 적함을 한산도 속 바다로 유인해 끌어넣어 싸운다. 저녁이 되면 밀물이 밀려오니 바깥으로 달아나지 못한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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