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38편
이순신 한산도대첩 승리
승전보에 서인들 ‘떨떠름’
선조는 서인 눈치 보느라
‘이순신 정1품 하사’ 취소
그제야 서인들 안도의 한숨

적막이 흐르던 의주 행재소에 뜻밖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왜군의 진격을 걱정하던 선조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터뜨리면서 “이순신을 정1품에 제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서인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이 동인 류성룡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든 당파싸움이 문제다. 친윤, 반윤, 친명, 반명…, 공교롭게도 지금 정당도 똑같은 상황이다.

정치인의 당파싸움은 퇴행적 문화의 산물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치인의 당파싸움은 퇴행적 문화의 산물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산대첩을 이끈 이순신은 패배하고 도망가는 14척의 왜적 함선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날이 저문 데다 군사들도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견내량 안바다로 돌아와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하지만 깊은 밤에도 배 4~5척이 바다를 떠돌아다녔다. 낮에 공을 세우지 못한 원균이 바다에 떠다니는 적의 시체를 찾아 목을 베고 있었던 거다. 싸움이 끝나면 이순신 모르게 조정에 공을 보고하자는 비루한 생각 때문이었다. 조정에는 원균을 용감한 장수인 양 챙겨주는 이항복(서인), 이산해(동인) 같은 고위 공직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한산도 주변의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짓이겨 놓은 복수심으로 죽은 왜적의 수급을 베어 순신의 함대에 찾아와 바쳤다. 순신은 경상도에서 벌어진 전투의 대가를 받을 수 없어 해당 지방의 대장인 원균에게 주라고 했다. 수급을 좋아하는 원균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중 일부는 순신에게 다시 바쳤지만 졸지에 원균의 전공은 전라우수군 대장 이억기를 능가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 무렵, 간신히 살아나 후방으로 달아난 왜적들은 패배 원인을 물어보는 사령관 구귀가륭에게 이런 변명을 했다. “조선 수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었습니다. 협판안치의 명령으로 속도를 내어 진격하다 보니 후미의 사령관 함대와 거리가 5리(1리=0.4㎞)가량 떨어지게 됐습니다. 우리는 조선 함대로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적의 함포 사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구귀가륭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다시 물었다. “다시 이순신과 전투를 벌인다면 과연 승산이 있겠느냐?” 그러자 왜적 패잔병들은 “저 괴물들과 싸우느니 그냥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라며 아우성쳤다. 결국 40여척의 왜군 주력 함선은 이순신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좁디좁은 안골포로 숨어들어가 정박했다. 

이 소식은 풍신수길의 귀에도 들어갔다. “평생 전장에서 보냈지만 저들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부류”라며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순신의 함대와는 앞으로 교전을 삼가라.”

한산도대첩 소식이 의주 행재소에 도달한 건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7월 하순께였다. 적막한 행재소에서 조선 군신들은 왜군이 밀려들어 오지 않나 마음을 졸이고 있던 때였다. “왜구 수군이 남방연해에서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서해를 오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때 전라도사 최철견이 감사 이광의 명을 받아 좌수사 순신이 대승리를 거뒀다는 첩서를 갖고 행재소로 왔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겠는가. 

윤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견내량과 한산도 사이의 바다에서 적선 70여척을 당파하고 적군 9000여명을 섬멸하였다고 합니다.” 선조는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듯 기뻐했다. 전라도사 최철견은 선조의 앞에 엎드려 순신이 승첩한 장계를 받들어 올렸다.

장계에는 한산도대첩을 시작한 전말과 공을 이룬 제장의 성명이 상세히 쓰여 있었다. 끝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제장과 군졸 등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여러 차례 힘써 싸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행조行朝가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혀 있으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다 보면 시일이 늦어져 군사들을 감동시킬 수 없어 죽기로 싸웠습니다.”

선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허리를 펴고 소리를 질렀다. “과연 이순신은 천하 명장이로다. 호랑이떼 같은 천하막강지적을 연하여 때려 부수니 참으로 만고에 드문 영웅이로다!”

선조의 좌우엔 영의정 최흥원, 좌의정 윤두수, 우의정 유홍, 영부사 류성룡, 판부사 정철, 좌찬성(의정부에 소속된 종일품직) 윤근수, 병조판서 이항복 등이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순신의 대승첩을 기뻐하지 않는 이가 많았다. 나랏일은 어찌 되든 말든 순신은 류성룡이 천거한 사람이어서 동인東人으로 분류된 까닭이었다.

선조는 승지를 불러 순신을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작위에 올리라고 명하고, 송여종을 전라도 수령 중 비어 있는 남평南平현감을 시키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정철은 “이순신의 공이 적다 할 수는 없지만 그만한 공에 정1품을 주신다 하면 더 큰 공을 세울 때에는 무엇으로 갚으려 하시겠습니까?”라며 교묘하게 반대했다.

정철의 말에 조정에 있는 많은 서인은 통쾌함을 느꼈다. ‘이놈들이 또 당파싸움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한 선조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면 1품이라는 작록은 당파싸움 잘하는 자들만 가지는 것인가?”라며 정철을 노려봤다. 정철은 선조의 노함을 보고 안색이 붉어졌다. 

류성룡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러자 윤두수가 “조정이 모두 이순신에게 정1품을 내리심을 ‘불가’라 하오니 정2품으로 하심이 옳을까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미 순신은 정2품이었다. 순신은 1차 출전 승리로 종2품 가선대부로, 2차 출전 승리로 정2품 하위 품계인 자헌대부로 승급한 바 있다.

서인이 이순신을 견제한 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서인이 이순신을 견제한 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심지가 약한 선조는 윤두수, 정철 등 수많은 서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윤두수의 말대로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순신에게 주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권준ㆍ이순신李純信ㆍ어영담 등은 가선대부동지嘉善大夫同知로, 이하 제장도 차차 봉작했다. 송여종은 순신의 휘하에서 전공을 더 세우는 게 좋겠다고 하명했다.

선조가 ‘이순신 정1품 하사’를 철회하자 서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순신을 아끼는 류성룡이 불만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순신의 성품을 워낙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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