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년 10월 조선 조정이 거제도 일대에서 진행한 ‘왜적 소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지도자들의 결함에 있었다. 총사령관을 맡은 윤두수, 현장 사령관 권율은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는 우愚를 범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을 입에 달기 시작한 정치꾼 중에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몇이나 될까.좌의정 윤두수가 선조를 움직이게 한 배경에는 원균이 있었다. 원균은 자신의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바로 사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된 뒤 이순신은 전황의 변화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7월 15일 한산도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본 결정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지만, 전제가 있다.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신당을 준비한다. 그들은 과연 누굴 위해 창당하려는 걸까.왜군은 무려 8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공격을 펼쳤으나 진주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일째 되던 날, 왜군 장수 후등기차後藤基次(고토 모토쓰구)가 계책을
날씨가 좀처럼 받쳐주지 않았다. 부산포로 향하던 조선 연합함대는 거친 날씨 탓에 번번이 바다에서 발이 묶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공격하라’는 지령만 내리고 있었다. 자고로 지도자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장에 걸맞지 않은 지시나 명령만 주야장천 하달해 지도자가 되레 ‘악당(빌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견내량에 집결한 조선 수군은 2월 8일 칠천도로 이동해 머물고 9일 새벽에 부산포를 목적지로 삼아 출발하려 했다. 이때 폭우가 내리자 이순신은 칠천량과 가덕도에 진을
이순신이 적을 붙잡아 효수梟首한 일이 많았던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에게 전투 시에 적의 머리를 베는 것보다 적선을 깨뜨리는 데 집중하라고 당부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당시 적의 수급首級, 이를테면 머리는 전공을 평가하는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머리를 베는 데만 골몰하는 원균을 비웃기도 하고, 자신이 확보한 수급을 중국 장수들에게 양보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이순신은 침략전이 아니라 방어전의 영웅이었습니다. 백성과 인명을 중시했으며,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거나 부상당한 사람을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차별하지
불패의 명장 이순신이순신이 직접 해전에 참여해 출동한 것은 16회였습니다. 한번 출동해서 한번만 전투를 한 적도 있고, 두번 이상의 전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23전 23승’을 했는지, 아니면 ‘30전 30승’을 했는지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쨌든 이순신은 임진왜란 동안 열여섯번 출동해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패배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도, 적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반면 원균이 당한 단 한번의 패배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칠천
이순신이 주둔하던 당시에는 제승당制勝堂이 아니라 운주당運籌堂이었습니다. 운주란 ‘계책을 운용하다’는 뜻입니다. 작전 본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순신은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운주당에 와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후엔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됐습니다. 회의와 협의가 중단됐고, 외부와의 교류와 내부 소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하고, 운주당도 불에 전소돼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1738년(영조 15년)에야,
이순신은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통일된 지휘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로 내정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기 한달 전인 1593년 7월 15일, 이순신은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습니다. 한산도 통제영의 건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순신은 한산도 곳곳으로 진을 옮기며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전라도로 가는 바닷길을 틀어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593년 3월 8일, “한산도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난중일기」에 등장합
익숙한 단어 몇 개를 떠올려 봅니다. 통영, 충무 그리고 충무김밥. 모두가 임진왜란이나 충무공 이순신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단어를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니, 새삼 신기합니다.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 통제영三道水軍 統制營’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원래 이름은 ‘가배량수’였는데 통제영이 세워진 후부터 통영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였습니다. 삼도三島는 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를 뜻하고, 삼도 수군은 충청 수영ㆍ전라 좌수영ㆍ전라 우수영ㆍ경상 좌수영ㆍ경상 우수영을 의미합니다. 전라
이순신의 탁월함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승리를 해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순신의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목포 고하도에 석달 열흘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사이 본격적으로 수군 재정비를 진행했죠. 지금도 목포 고하도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려 세운 모충각이 있습니다. 고하도뿐만 아니라 목포 곳곳에서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목포 유달산의 끝자락에는 큰 바위로만 이루어진 봉우리가 하나 있습니다. 높이가 60m가량으로, 20층짜리 건물만한 크기입니다. 그 봉우리의 이름은 노적봉
왜군이 경상도의 오른쪽 바다라 할 수 있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날이 1597년 7월 16일입니다. 기세등등해진 왜군이 서쪽으로 진격해 오다가 명량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판옥선을 만났습니다. 칠천량해전 두달 후인 9월 16일입니다. 그 결과는 전쟁의 판도를 결정짓는 치명적인 왜군의 패배였습니다.이날 이순신이 지휘한 13척의 배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배였습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던 그때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배설이 지휘하던 배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배설의 배로 기세등등하던 왜군에
이순신 장군의 발길 따라 전국을 누볐다. 그가 태어난 서울 충무로에서 세상을 떠난 남해 관음포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긴 여정을 시작한 건 500년 시간을 뛰어넘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받은 ‘위안’ 때문이었다.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소통에 능한 리더”라고 잘라 말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를 만났다. ✚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몇해 전 사업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뜻이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인 퇴계 이황과 성웅으로 불리는 이순신 장군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때론 임금의 명령이라도 대의에 어긋나면 단호하게 거절해 모진 수난을 받기도 했다.퇴계는 조정에서 불러도 병을 이유로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을 받더라도 곧바로 사직했다. 명종은 화공을 퇴계 고향으로 보내 그린 풍경화로 병풍을 만들어 옆에 두고 볼 정도로 퇴계를 흠모했다. 명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퇴계를 예조판서로 임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정진했다.‘매불매향梅不賣香’이란 말이 있다. 매화는 춥더
1597년 울돌목鬱陶項으로 해선 300척이 집결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참모회의를 소집한다. 같은 해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대패해 달랑 12척의 배만 남긴 배설裵楔 장군은 어마무시한 왜적에 대항해 “그래도 나니까 12척이나마 건졌다”면서 이 싸움의 무모함을 설파한다. 배설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12척이나’ 건져왔는지 ‘12척밖에’ 못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