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48편
진주성 무너지자 견내량 사수 전략
대처 위해 한산도 지휘본부 설치
본영 옮긴 건 ‘전략적 리더십’ 발현
총선 앞두고 신당 창당 움직임
하지만 확실한 명분 있어야 해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된 뒤 이순신은 전황의 변화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7월 15일 한산도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본 결정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지만, 전제가 있다.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신당을 준비한다. 그들은 과연 누굴 위해 창당하려는 걸까.

명분 없이 조직을 만들면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기 힘들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명분 없이 조직을 만들면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기 힘들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왜군은 무려 8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공격을 펼쳤으나 진주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일째 되던 날, 왜군 장수 후등기차後藤基次(고토 모토쓰구)가 계책을 냈다. 군사들의 몸에 생우피生牛皮를 뒤집어씌우고 돌진시켜 성곽의 돌을 빼내겠다는 전략이다. 

성 위에서 조선군이 끓는 물 세례를 퍼부어도 생우피를 걸쳐 쓴 왜적에겐 별 효력이 없었다. 그렇게 하나씩 돌이 빠지자 여름철 장마로 물에 젖은 성벽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왜적은 쓰나미처럼 진주성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결국 6월 29일, 진주성 안에 있던 1만여명의 조선 군사와 4만여명의 백성들 중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살육을 당했다. 한편으로는 강화회담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이처럼 대규모 학살극을 벌인 것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세계 전쟁사에는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절대로 왜적을 믿지 마라”고 당부한 바 있지만 조선은 이때의 교훈을 이어가지 못해 결국은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진주성이 처참하게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등 여러 장수는 촉석루矗石樓에서 선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네번 절하고 난 후 남강南江에 몸을 던졌다. 이들과 함께 어떻게든 성을 지키려 했던 충청병사 황진은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날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성을 점령한 왜군 장수들은 촉석루에서 기생들을 동원해 승전축하 잔치를 벌였다. 적장 중 한 명이 진주기생 논개論介가 춤을 추는 모습에 반해 그녀를 품에 안으려 했다. 논개는 그 장수의 허리를 안고 남강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어 ‘슬픈 낙화’의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왜군은 비록 진주성을 함락했지만 전투에서 3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호남까지 공격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게다가 왜적은 한산도해전에서 이미 이순신에게 크게 피해를 입어 서쪽 관문인 거제도 쪽으로 진출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시 이순신은 한산도의 이곳저곳에서 정박하며 견내량의 해로를 차단하면서 왜군의 서진을 막는 전략을 선택했다. 7월 5일, 이순신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의 모든 백성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또 왜군들이 진해만과 칠천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 장문포 등에 난공불락의 왜성을 쌓고 주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견내량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불편함과 고통을 이겨내며 수군들과 함께 한산도 바다 위에 떠 있어야만 했던 이순신은 이같은 상황변화에 따라 대처가 필요했다. 때로는 육지에서, 때로는 바다에서 진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7월 15일 한산도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이 내용을 남긴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이날을 본영을 설치한 날이라고 기록하는 이도 있고 임시 막사를 세운 날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다. 무엇 때문에 지휘본부를 세웠느냐가 더 중요하다.

본영을 옮긴 것은 분명 ‘전략적 리더십’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적이고 근거 있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면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추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원칙과 명분, 행동과 실행은 전혀 보이지 않고 말로만 국민을 위하고 애국하고 보국하겠다는 요즘의 리더들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한달 뒤인 1953년 8월 15일,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겸 조선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임진왜란 중에 신설된 직책이긴 했지만 요즘으로 따지면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조선 조정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한 배경은 나름 전략적이긴 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꽤나 안타까운 상황들이 얽혀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정반대의 상황인 경우가 많았다. 육군의 경우 도체찰사를 비롯, 체찰사ㆍ도원수ㆍ순변사ㆍ방어사 등 임시방편으로 만든 직책들이 많아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무능력한 인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낭패를 본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반면 수군은 수군절도사ㆍ첨절제사ㆍ만호 등 지휘체계가 확실한 가운데 이순신의 수군이 연전연승하면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 수군절도사 3명이 협의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는 체계여서 갈등이 생길 여지가 다분했다. 

이순신과 원균의 껄끄러운 관계가 대표적이다. 선조와 류성룡은 수군만이라도 조정의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에 명나라 육군이 참전하면서 조선 육군은 명나라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뒷바라지만 하는 처지였다. 반면 이순신의 수군은 전시 작전권을 쥐고 있어 조선 조정의 지휘가 가능했다. 

진주성 대패 후 이순신 앞에도 새로운 전황이 펼쳐졌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진주성 대패 후 이순신 앞에도 새로운 전황이 펼쳐졌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선조가 “왜군과 강화를 언급하는 자는 선참후계先斬後啓하라”는 강력한 강화 반대 의지를 표명한 것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조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서에도 이런 의지가 담겨있다.

“돌아보건대 병가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통솔할 사람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다급한 때를 만나면 처치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적의 세력이 아직 뿌리 뽑히지 않았고 속이고 거짓말함이 갈수록 더하니 어찌하리오. 부산에서 창칼을 거두어 겉으로는 군사를 물릴 듯한 뜻을 보이면서, 대책을 세우기가 전보다 어려울 것이다. 이에 경을 본직에 더하여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노라. 아! 위엄은 사랑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진실로 이뤄지고, 공로는 뜻을 세움으로써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바다 밖의 적들을 끊어 사방에서 우리를 업신여기는 자가 없게 함은 그대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 경은 적들을 크게 무찌르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으며, ‘한 치의 땅이라도 수복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될 수 없다’ 하였으니 내 어찌 작은 성공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교서를 내리는 바이니 헤아려 잘 알도록 하라.”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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