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⑬

조정에서 당파싸움이 벌어질 때, 이순신은 일본국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군함과 병기를 정리하는 한편 쇠를 다루는 명인을 불러 예리한 무기를 제조했다. 관하 오읍육진에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1592년 4월, 일본국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다.

 

수군을 폐하자는 주장에 순신은 이렇게 탄식했다. “조정에서 신립이 일본인은 수전에 능하니 수군을 폐하자 하였으나, 이는 일본의 군사상 사정을 모르는 어리석은 말이다. 일본인이 육전에도 능하다 하면 우리는 육전으로 대항할 수 없으니 육군도 폐하자 할 것인가. 바다로 오는 적군을 요진要津(중요한 길목의 나루)•요충要衝(지세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서 준비하였다가 쳐부수지 아니하고 내륙으로 불러들려 산 백성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말 것인가. 적이 비록 1000척 병선에 수십만 대군을 몰고 온다 할지라도 조선 연해의 험이險易(험난함과 평탄함), 조수의 순역順逆(순리와 역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알지 못할 것인즉 수군이 있으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병선만 격파하면 대륙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제 조정에서 이러한 파문이 일어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로다.”

2호 거북선을 건조하기 시작한 순신은 곧 분향하고 엎드려 장계를 지었다. ‘동풍이 크게 분 뒤 일본국 쪽으로부터 배 짓는 나무조각이 바다를 덮어 떠온다’ ‘일본에 끌려갔던 어민 공대원의 말을 들으면 일본에서 오래지 않아 조선과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30만이 넘는 대군을 일으킨다’ ‘일본에서는 포구마다 병선을 짓는다’ ‘수길의 호승지벽好勝之癖(남과 겨뤄 이기기를 좋아하는 성미나 버릇)이 정녕코 이웃나라를 범할 것이다’는 말을 상세하게 썼다. 그 후 “바다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수군밖에 없사오니 국방의 대책大策은 수군이거나 육군이거나 어느 것을 물론하고 한쪽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는 말을 덧붙여 선조에게 올렸다.

신립이 청한 대로 육군에만 전력하고 수군을 파한다는 교서를 이순신에게 내리려고 하던 차에 순신의 장계를 받은 선조는 무릎을 치며 순신의 문장을 못내 칭찬하였다. 선조는 수군 혁파를 주장하는 제신들에게 그 장계를 돌려 보이고 더 다른 의견을 묻지도 않고 순신의 장계에 옳다고 윤허했다. 대장 신립의 계본에는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지批旨(상소에 대해 임금이 내리는 답)를 내렸다. 신립의 수군혁파안은 이순신의 수륙병존안에 패하였다. 순신의 문장으로 인하여 선조의 뜻이 기울어졌다.

순신의 장계로 수군혁파는 면했지만 동인의 비전론非戰論과 서인의 육군주의陸軍主義 때문에 또 다른 20척의 거북선 건조와 수군확장안은 뜻대로 되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 정부가 군비를 할까말까 수군을 둘까말까를 두고 싸움을 일삼는 동안 일본은 대륙침략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순신의 장계, 어심을 돌리다

대마도수對馬島守 종의지宗義智(소요시토시)는 원래에 전쟁을 원치 않아 풍신수길이 조선길을 빌려 명나라에 침입하려 한다는 계획과 머지않아 일본의 대군이 조선을 침범할 터이니 명나라에 이를 전해 외교적으로 해결하라고 충고하여왔다. “명나라가 오랫동안 일본과 왕래가 끊어져 외교사절이 없으므로 풍신수길이 분하고 부끄러움을 품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이 이 뜻을 명나라에 알려 일본으로 하여금 사절의 길을 통하게 하면 무사할 것이요, 일본 백성들도 또한 전쟁의 노역을 면할 겁니다.” 그러나 김성일은 이 말을 조정에 알리지 아니하였다. 풍신수길은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라는 자신의 주장을 뒤엎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 임진년, 일본국 대군이 조선의 땅에 발을 들여놨다. 사진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준의 전투배치도. [사진=더스쿠프 포토]

현소는 김성일의 어리석고 고집 세고 무성의함을 웃어넘기고 다시 선위사宣慰使(외국사신을 영접하던 일을 하던 벼슬) 오억령吳億齡에게 명년에는 일본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칠 것을 말했고, 오억령이 크게 놀라 조정에 이 사실을 전했다. 선조는 비전론자들의 말을 믿고 오억령이 망언한다 하여 선위사라는 오억령의 관직을 파면하여 버렸다. 오억령은 나라를 위하여 개탄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중심을 잡고 있는 이는 오직 전라좌수사 이순신뿐이었다. 그는 모든 장애를 물리치고 군함과 병기를 정리하며 거북선도 두척을 조성하였다. 또한 관하 오읍 육진에도 군사를 훈련케 하고, 경향京鄕(서울과 시골을 아우르는 말)을 물론하고 쇠를 다루는 명인을 불러 예리한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 이에 따라 남방의 충의롭고 세상을 개탄하는 인물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들었는데, 당대 명장이던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그중 한명이었다. 순신이 군대를 다스리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모방하였다. 순천부사 권준도 호걸이다. 거북선을 모방하여 1척을 지었다. 우후(절도사에 소속된 관직) 이몽구李夢龜 이외에도 각읍 각진의 수령 변장들도 순신에게 감화를 받아 정성을 다해 군대를 다스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열심이었다.

임진년 1592년 3월 5일 일기를 보면 상경하였던 진무가 돌아와 좌상 유성룡의 서간을 전한다. 그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 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자를 보냈다. 이는 수륙전의 전술을 논의한 책자다. 유성룡이 기서奇書(내용이 기이한 책)를 구해 순신의 전략전술을 보조하자는 뜻이었다. 이를 읽은 순신은 “참으로 만고의 뛰어난 이론”이라며 채용하였다. 임진년 1592년 4월 12일 일본국 함대 700여척이 15만 대군을 싣고 부산항 앞바다에 다다랐다. 일본이 엄청난 수륙군을 출동시킨 건 관백關白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적 행동이었다. 수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임진년 4월 15만 대군 부산에 출몰

수길은 일본 미장국(아이치현의 서부에 해당)의 중촌中村(나카무라)이라는 궁벽한 촌락에서 1536년 1월 1일 묘시에 태어났다. 수길의 부친은 미우위문彌右衛門(야우에몬). 전장에서 부상하고 중촌에 돌아와 사냥꾼의 딸에게 장가 들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지가 딱했다. 수길을 잉태할 때에 모친은 해를 집어삼키는 꿈을 꿨다고 하여 아명을 ‘일길환日吉丸’이라 하였다. 또는 ‘신지조申之助’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아이 모습이 원숭이 같고 원숭이의 해(병신년)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수길의 다음으로 딸과 둘째 아들을 두었다. 수길의 나이 8세가 되던 때 부친이 사망하였다. 이후 어머니가 고생하는 게 어린 수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루는 수길이 모친에게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 모친은 “아직 어린애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였다. 수길은 걱정 말라 하고 멀지 않은 광명사光明寺라는 절로 찾아가 중의 상좌가 되었다. 그래서 승려들에게 한문을 배우고 글씨도 배우는데 글씨에는 천재였다. 참으로 명필의 수완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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