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⑨

관청 뜰에는 사형을 집행할 형구가 벌여있고 건장한 나졸이 좌우로 늘어선 것을 본 순신은 분을 참을 수 없었던지 노한 눈으로 이일을 노려봤다. 이일은 그만 겁이 나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신의 당당한 언변에 대답할 용기를 상실하고 나무토막 같이 되었다. 순신은 신장 8척에 위풍이 늠름한 장사다. 불법의 억지 형벌에 굴복할 인물은 아닌 줄을 이일도 느낀 모양이었다.

 

▲ 위풍당당한 순신은 어떤 불의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일이 순신에게 ‘패전사유를 써서 올리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순신은 끄덕없다. 되레 엄정한 태도로 거절했다. “내가 녹둔도를 수비하는 군사가 적음을 걱정하여 증병해 달라고 여러번 요청했지만 병사가 종시 불청하였습니다. 청병을 원하는 서류 원본이 증거로 엄연히 있은즉 만일 조정에서 이 일을 알면 그 죄가 내게는 있지 아니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호적의 맹장들을 쳐 베고, 잡혀갔던 군민 60여인을 탈환하였거늘, 어찌 병사는 패군하였다 하시오? 여러 사람이 본 바이거늘 혼자 우기면 되오?”

관청 뜰에는 사형을 집행할 형구가 벌여있고 건장한 나졸이 좌우로 늘어선 것을 본 순신은 분을 참을 수 없었던지 노한 눈으로 이일을 노려봤다. 이일은 그만 겁이 나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신의 당당한 언변에 대답할 용기를 상실하고 나무토막같이 되었다. 순신은 신장 8척에 위풍이 당당한 장사다. 불법의 억지 형벌에 굴복할 인물은 아닌 줄을 이일도 느낀 모양이었다.
 

▲ 15년 동안 변방을 떠돌던 순신은 간신히 정읍현감에 올랐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의 전포에는 전쟁의 혈흔이 낭자하여서 보기에 무서웠다. 순신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상관으로서 호령하던 이일은 의기가 꺾여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정신없이 앉았다가 순신을 하옥하라고 한마디 말을 하고 순신의 죄를 얽어 장계를 올렸다. 이 장계를 본 선조는 “이순신은 패군할 장수가 아닐 것이니 한쪽의 말만 믿을 수 없다”며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했다. 순신은 은혜를 감사하고 출옥하였다. 그해 12월 두만강 건너편 시전時錢이라는 마을에서 귀순한 오랑캐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북변 각읍을 침략했다. 순신이 비록 관직은 삭탈되고 백의종군이 되었으나 그 용략은 세인이 다 아는 바이다. 경원慶源 온성穩城 부령富寧의 수령에게 순신이 선봉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수령들도 그 억울함을 알기에 곧 선봉을 삼아 정병 500명을 주었다.

순신은 두만강 얼음 위를 도강해 차가운 삭풍을 무릅쓰고 시전 부락에 도착했는데, 밤이 깊은 시간이라 적들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불시에 소굴에 들어가 적장 3인을 풍우같이 베고 유유히 돌아오니 적들이 잠을 깨어 일어나 군사를 정돈하여 순신의 뒤를 쫓아온다. 순신이 험한 골짜기로 유인하여 매복하여 둔 복병으로 격파해 시전의 어려움을 평정하였다. 그 전공으로 순신은 백의종군이란 벌을 면제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서울에서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던 순신은 이렇게 탄식했다.

억지형벌에 당당히 맞서다

“대장부를 국가에서 쓰면 충성을 다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지 아니하면 구름 걸친 숲에 밭갈기와 달 비치는 여울가에 낚시질하기를 일삼을 것이며, 본래부터 품은 뜻을 굽혀 권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여 덧없는 세상의 허영을 엿본다면 이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그러면서 자기의 처향妻鄕인 아산현으로 돌아가 방화산 기슭 백암촌에 은거하려 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 참고: 순신이 이윤, 안연, 공명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세속을 피해 삶을 영위한 이들은 세상에서 인정받은 현인들이다. 이윤은 신야에서 탕왕의 방문을 세번 받고 상나라(은나라)의 건국을 도왔다. 안연은 누추한 살림을 하면서도 도를 즐겨 공자에게 인정을 받았다. 제갈공명은 남양에서 유비의 방문을 세 번 받고 삼국 중 촉의 건립을 도왔다.]

순신이 백암촌에 은거하던 당시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맹렬했고, 정치는 문란하고 인심은 천박했다. 아부하는 자는 등용하고 정직한 사람은 미움을 받았다. 순신처럼 막대한 공을 세웠지만 시기모함에 빠지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순신이 비분강개의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88년 6월에 조정에서 문무 재국을 겸비한 장수의 자격이 있는 사람을 물색하였다. 대신 중에 유성룡, 정탁鄭琢, 정철鄭澈의 무리가 이순신, 권율, 김시민金時敏, 신립, 이억기,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 7인을 적임자로 추천하였다. 비변사에서 불차탁용(계급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벼슬에 동원)에 선발돼서 신립이 제1, 이순신이 제2, 이억기가 제3이 되었지만 순신은 백의종군한 일로 인해 죄는 풀렸지만 서명(고려ㆍ조선시대에 관리의 임용이나 법령의 제ㆍ개정에는 대간의 서명을 거쳐야 했다)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임관되지는 못했다.
 

순신의 나이 45세가 되던 1589년 2월 전라감사 이광李珖이 순신을 특별히 불러 행수군관(군관 중의 우두머리)를 삼았다. 순신이 부임하니 이광이 후히 대우하면서 이런 이유로 전라도 조방장(주장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느 장수)을 겸임하게 했다. “그대 같은 영재가 이처럼 떠돌아다님이 탄식할 일이다.” 이광은 그 당시에 문무재라는 명망이 있는 사람이다. 순신이 조방장으로 순행巡行하여 순천부에 이르니 부사 권준權俊이 순신을 영접하고 음주 대작하는 사이에 순신이 권세를 얻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순천은 큰 고을이니 귀하 같은 영준으로 내 자리를 대신하여 순천부사가 되는 것이 좋겠소”라며 자기의 지위를 자부한다.

순신은 아무 대답이 없이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이는 권준의 실언함을 일소에 붙이고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에 무겸선전관(무관으로 선전관을 겸직한 자리. 선전관은 조선시대에 왕명ㆍ증명서류 전달 등을 담당하던 관직)을 맡아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불과 지나지 않아 다음달 12월에 전라도 정읍井邑현감(조선시대 문곤 종6품 외관직)에 발령되었다. 순신이 무변으로 출사出仕한 지 15년 만에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된 것이었다. 그뒤 태인泰仁현감을 겸임하여 그 고을에 도임하였다. 태인 고을에는 현감이 오랫동안 공직이어서 백성의 소송 등 공사公事가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순신이 붓을 잡아 일일이 처결하여 잠깐 사이에 모두 처리하였다.

공정한 일처리에 백성들 환호성

백성들은 관청 뜰에 모여 원님의 수완과 처사가 민첩하고도 공정함을 보고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어사御使에게 장계를 올려 이순신으로 하여금 태인현감에 전임시켜 달라고 청원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에 전라도사 조대중曺大中이 서신으로 순신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조대중의 호는 정곡鼎谷이요, 어질고 반듯한 선비라 순신과도 친분이 각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순신 역시 회답을 했는데, 그뒤 조대중은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걸려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무렵, 순신은 전라도 차사원(중요한 임무를 받고 다른 곳에 파견 나가는 관원)으로 상경하는 중에 우연히 금오랑(의굼부도사의 별칭)을 만났다. 그는 본래부터 순신과 친분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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