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ㆍLPㆍ삐삐ㆍ통세탁기 “살아 있네~”
순정만화ㆍLPㆍ삐삐ㆍ통세탁기 “살아 있네~”
  • 김정덕 기자
  • 호수 125
  • 승인 2015.01.16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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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복고 열풍

▲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바뀐 전환기 1990년대에는 새로운 문화가 마구 넘쳤다.[사진=더스쿠프 포토]
1990년대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1990년대 가수를 조명한 게 이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1990년대 복고열풍은 오래 전부터 산업 곳곳에 불고 있었다. 굳이 열거하자면 LP, 삐삐, 전자동 세탁기, 순정만화 등이다. ‘살아 있는’ 1990년대 콘텐트를 살펴봤다.

MBC 무한도전에서 진행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가 화제다. TV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요즘, 이 프로그램은 순간시청률 35.9%를 기록했다. 그야말로 열풍이다. 배경은 뭘까. 일부 전문가들은 ‘풍요로운 과거에 대한 동경’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의 1990년대는 정치ㆍ경제ㆍ문화적으로 호황을 누렸다. 반면 지금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거지고, 경기는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이런 현실의 좌절감이 ‘풍요로운 과거’를 불러왔다는 거다.

또 다른 이유는 아날로그 감성에 있다. ‘차갑고 딱딱한’ 디지털에서 보기 힘든 ‘부드럽고 따뜻한’ 감성을 찾는다는 거다. 2010년 쎄시봉과 통기타가 인기를 끌 때, 김동식 인하대(국문학) 교수가 복고를 “압축된 근대화 과정에서 느끼지 못했거나 잊었던 경험들에 대한 계몽의 복습”이라고 말한 이유다. 복고는 인간의 기본 감성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특히 1990년대는 각종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바뀐 전환기다. 새로움이 넘쳐났다는 얘기다. 당시에 새로운 것들이 지금 세대들에겐 평범해서 큰 이질감이 없다. 현재의 뿌리가 1990년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디지털로 전환되지 못한 것들은 완전히 새로운 문화로 비칠 수도 있다. 결국 풍요로운 과거의 동경, 아날로그 감성으로의 회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라는 독특한 ‘1990년대의 분위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토토가 열풍을 만들어냈다. 이런 분위기는 음악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1990년대의 분위기를 간직한 다양한 아이템과 콘텐트가 부활하고 있다.

◆ 필름은 끊어지지 않았다 = 가장 대표적인 건 1990년대 영화의 부활이다. 롯데시네마는 2013년 말 홈페이지에 ‘다시 보고 싶은 명작 영화는?’이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10위까지의 결과를 발표했는데 ‘러브레터(22%)’가 1위를 차지했고, ‘8월의 크리스마스(18%)’가 2위, ‘레옹(14%)’이 3위였다. ‘흐르는 강물처럼’ ‘올드보이’ ‘해피투게더’ ‘유콜잇러브’ ‘그랑블루’ ‘연인’이 뒤를 이었다. 재밌는 건 이들 중 7편이, 그리고 1위부터 4위까지가 모두 1990년대에 개봉한 영화라는 점이다.

롯데시네마는 설문을 반영해 이 영화들을 재개봉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러브레터’는 4만5000명, ‘8월의 크리스마스’는 2만3000명, ‘레옹’은 4만3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일반적으로 재개봉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1만5000명~2만명 수준이라는 걸 감안하면 세 영화 모두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10위권 영화의 평균 관객수도 1만4600여명이었다. 불법 다운로드가 횡행하는 요즘,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이만한 관객이 움직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번 사라지면 복구 힘든 복고

사실 이처럼 1990년대 영화들이 재개봉될 수 있었던 건 ‘실버극장’으로 불리는 재개봉 전용관들이 관객 동원에 선전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롯데시네마는 이런 호응에 힘입어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추억의 영화들도 차례로 재개봉할 예정이다.

 
◆모바일에서 뜨는 순정만화 = 순정만화의 호황도 1990년대와 맞닿아 있다. 모바일 유료만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네이버북스에서 톱10에 속하는 만화 중 6편의 장르가 순정만화다. 3편은 드라마로 분류되지만, 사실 전체 줄거리는 순정만화에 가깝다. 1편만 완전한 무협만화다. 카카오페이지에서도 만화 판매량 중 65%가 순정만화다. 사실상 온라인 만화시장을 순정만화가 독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잡지 ‘보고’의 백정숙 편집위원장에 따르면 순정만화의 인기는 198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1990년대에 들어 전성기를 맞았다. 백정숙 편집위원장은 “당시엔 배경이 현실과 동떨어진 순정만화가 많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시대 상황과 배경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순정만화는 200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7년 청소년보호법과 함께 전체 만화시장이 위축되면서다. 한국만화연감에 따르면 순정만화 단행본 수도 2002년 835종에서 2011년 189종으로 확 줄었다.

그러다 최근 몇년 전부터 웹툰의 인기로 인터넷 만화시장이 커지면서 분위기도 달라졌다. 네이버북스와 카카오페이지 등 만화를 볼 수 있는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앱)도 생겼다. 만화가들은 이제 웹툰 형식에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복잡한 그림체나 구구절절한 서사는 빼고, 가벼운 그림체와 속도감 있는 내용의 순정만화를 내놓으면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1990년대에 순정만화를 즐겨봤던 이들이 구매력 있는 30~40대로 성장했다는 점은 유료만화 구독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 진정한 음악의 상징, LP = LP(Long Play ing)레코드도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LP는 1990년대의 아이템이 아니다. LP는 1980년대에 전축이 등장하면서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1990년대 중반에 CD가 등장하며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작곡가나 나이트클럽 디제이(DJ)들과 같은 전문가들의 손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아직 아날로그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던 때에는 갖가지 음원을 따내려면 LP가 유용했기 때문이다. 

ITㆍ가전업계에도 1990년대 열풍

그러다 1990년대 말 한국에 힙합이 대중화하면서 LP는 다시 주목을 받았다. 너도나도 멋진 비트(랩 뒤에 깔리는 배경음악)를 만들어 내려면 LP에서 음원 샘플을 추출해야 했던 거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힙합은 LP와 함께 성장한 셈이다. LP를 1990년대의 아날로그 아이템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 LP가 최근 다시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미 음악을 만드는 작업은 디지털기기로도 전부 가능하다. 그런데도 LP가 다시 뜬 이유는 좀 특이하다. 디지털 음원에 익숙한 요즘 세대들에게 구시대의 LP는 생소하고 새로운 음원 저장장치였다. 더구나 일부 가수들이 중요한 음반을 낼 때 LP를 함께 냈기 때문에 희소성과 소장가치까지 더해졌다.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 LP의 성장세는 전세계적인 추세다. 미국에서 2007년 100만장가량 팔렸던 LP는 2014년 920만장이 팔렸고, 영국에서는 같은 기간 20만장에서 130만장으로 판매가 늘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LP를 생산하던 서라벌레코드사가 2005년 폐업한 이후 완전히 명맥이 끊겼다가 6년 후인 2011년 LP팩토리가 생기면서 LP가 다시 생산되고 있다. 이길용 LP팩토리 사장은 가수들이 LP를 제작할 곳이 없어 외국에서 제작해오는 걸 보면서 LP의 부활을 직감했단다. 실제로 2012년까지만 해도 LP팩토리는 고작 연 4000여장의 LP를 제작했지만, 최근엔 월 9000장을 제작하고 있다. 불과 1년 새 27배나 성장한 셈이다.

LP 제작과 판매가 늘면서 턴테이블 판매도 덩달아 성장세다. 인터넷쇼핑몰 인터파크에 따르면 2013년 한해 LPㆍ턴테이블 판매량은 전년 대비 500%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피커 시장도 커지고 있다. CD에 비해 몇 배나 비싼 LP를 아무 스피커나 연결해 음악을 듣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서다. 더구나 최근의 스피커들은 단순히 음악을 출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마트폰과 연동하거나 블루투스 기능까지 갖춘 스마트 스피커로 진화했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스마트 스피커 시장 규모는 연 6000억〜7000억원에 달한다.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디지털 음악 시장을 비집고 들어온 아날로그의 음악의 힘이다.

◆ 디지털 아날로그 입다 = 미래를 지향하는 IT업계에도 1990년대를 향한 복고 열풍은 비껴가지 않았다. LG전자는 2013년 8월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카페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이 파티에서 복고풍 디자인을 적용한 TV와 오디오, 미니빔 등 ‘클래식 시리즈’를 선보였다. 블루투스나 도킹(스마트폰과의 결합) 등 스마트폰과의 각종 연동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해 기능은 살리고, 디자인은 브라운관 TV나 구형 라디오를 입힌 거였다. 1970~80년대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출시했던 제품들을 기초로 해서 나온 디자인이다. 1990년대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중요한 건 1990년대에 브라운관 TV가 디지털 TV로, 구형 라디오가 CD플레이어나 MP3플레이어로, 아날로그 가전이 디지털 가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30~50대는 아날로그 이미지를 가장 마지막으로 보고 기억하는 동시에 가장 큰 구매력을 가진 세대다. 결국 클래식 시리즈의 주요 타깃이 ‘X세대’라는 얘기다. 정확한 집계는 나오지 않지만, LG전자 관계자는 “클래식 TV의 경우 매월 약 1000대가 판매되고 있다”며 “구매자는 젊은 독신 여성이 많고, 일부는 세컨드 TV로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 퇴출 당한 삐삐의 화려한 변신 = 1990년대에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부활한 아이템도 있다. 바로 무선호출기, 일명 삐삐다. 삐삐는 중도 변경이 되지 않아 약속을 한번 정하면 반드시 지켜야 했던 룰을 처음으로 깨뜨려 준 통신기기로 1990년대의 아이콘이었다. 한때 전국 가입자수 150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던 삐삐는 1990년대 말 휴대전화의 등장과 함께 급속하게 쇠퇴했다. 2011년엔 가입자수가 2만명으로 떨어지면서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많았다.

복고 비결, 새롭고 가치 있어야

하지만 최근 삐삐는 완전히 용도변경됐다. 상수도 무인검침에 쓰이고 있어서다. 수도 사용량을 자동으로 인식한 후, 무선호출 네트워크로 실시간 전송하는 역할이다. 일종의 사물인터넷과 같은 기능을 하는 셈이다. 김선규 서울이동통신 본부장은 “망 운영비용이 저렴하고, 전파도달거리가 넓어 효율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건 1990년대의 삐삐 마니아들의 작은 응원 덕분이다. 김선규 본부장에 따르면 서울이동통신은 가입자 수 감소로 인해 사업을 접으려 했다. 하지만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다시 삐삐에 관심을 가졌고, 일부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삐삐를 개통하기도 했다. 줄어들기만 하던 가입자 수가 조금 늘어나자 서울이동통신도 사업을 살릴 수 없을까 고민했고, 가장 기본적인 무선호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검침사업에 쓰게 됐다. 김 본부장은 “현재는 시범사업 중이지만, 향후 전기와 가스 등 각종 검침사업에 이와 같은 무인시스템을 적용하면 가입 수요는 약 5000만대(계량기 1대당 무선호출기 1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고객들의 응원으로 다시 부흥기를 맞이한 거다.

▲ 완전히 자취를 감출 뻔했던 LP레코드가 다시 시장으로 나오고 있다.[사진=뉴시스]
◆ 전자동 세탁기의 묘한 부활= 1990년대를 풍미했던 아이템이 여전히 건재한 경우도 있다. ‘통돌이(LG전자 세탁기 이름)’로 통하는 전자동 세탁기가 그렇다. 전자동 세탁기는 2000년대에 등장한 드럼세탁기에 밀려나는 듯했다. 하지만 두 제품을 모두 써 본 주부들 사이에서 ‘손빨래를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건 역시 전자동 세탁기’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다. 큰 빨래도 쉽게 넣을 수 있고, 전기를 비교적 적게 쓴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가격비교 사이트 ‘다나와’에 따르면 전자동 세탁기와 드럼세탁기의 판매량 점유율은 평균 6.5대3.5 수준으로 늘 전자동 세탁기 판매량이 더 많았다. 다나와의 이민환 과장은 “드럼세탁기에 비하면 광고도 거의 하지 않는 전자동 세탁기가 드럼세탁기에 밀린 적은 판매량 점유율을 조사한 이후 단 한번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1990년대를 자극하는 복고 열풍은 주변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선 괜히 복고 열풍을 쫓다가 후회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열기가 식으면 안 쫓아가느니만 못해서다. 그렇다면 이런 열풍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답은 ‘하기 나름’이다. 전미영 서울대(소비자학) 연구교수는 “언제 어느 시대에나 복고 열풍은 있었다”면서 “복고를 이용하려면 단순히 ‘과거와 똑같은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과거의 것이긴 하지만 ‘업그레이드된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복고 디자인을 살린 LG전자의 예에서 볼 수 있는 전략이다.

희소가치에 중점을 두고 향수를 자극하는 것도 방법이다. 임왕섭 브랜드 컨설턴트는 “복고는 과거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거나 보기 힘들어진 것들이 부활하는 것인 만큼 최대한 희소가치가 있는 아이템을 잡는 게 중요하다”면서 “여기에 ‘한정판’ 마케팅을 적절히 이용해 공략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LP의 부활이 여기에 속한다. 열풍이 불 때 그 분위기에 흡수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콘셉트를 잘 잡으면 언제 어느 시대건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다는 거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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