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51)

▲ 무능한 조선의 고위관리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일본군이 몰려오자 도원수 김명원은 좌상 윤두수에게 도망치자고 권했다. 그러면서 도망치는 ‘도리’도 설명했다. 첫째는 성문을 열고 백성에게 성을 지킬 수 없는 이유와 피난할 곳을 알리고, 둘째는 군기와 군량을 흙이나 물 속에 넣어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김명원은 좌상 윤두수에게 이런 권고를 남긴 직후 백성이 소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미리 달아나버렸다.

유성룡은 무능한 도원수(김명원)를 믿다간 “평양성이 또 탈나겠다”고 걱정했다. 하루바삐 중국 장수를 데려오는 것이 평양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종사관 홍종록洪宗錄, 신경진辛慶晋 등을 데리고 달밤에 평양을 떠나 영변 행재소에 도착했다. 영변 인근의 박천博川에서 선조를 만난 유성룡은 “대동강 물이 자꾸 줄어들어 적병이 길만 알면 얕은 여울목으로 건너올 염려가 있습니다”고 아뢰었다. 선조가 “강물의 얕은 곳을 방비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유성룡은 물 밑에 마름쇠를 깐다고 답했다. 선조는 지방관을 불러 ‘박천 군기고’에 있는 마름쇠 수만개를 평양으로 보냈다. 하지만 때 늦은 조치였다. 마름쇠가 평양에 도착하기 전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유성룡이 평양성을 떠나자 도원수 김명원은 꾀 하나를 냈다. “… 별장 고언백高彦伯을 기습사령관으로 삼아 적진을 야습하라….” 하지만 이 꾀는 되레 화가 됐다. 군사들은 출정시간에 모였지만 정작 고언백이 늦어 먼동이 터서야 적진에 당도했다. 물론 이때까진 효과가 있었다. 약한 조선군이 강을 건너와서 습격할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적병 1진이 늦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수 고언백은 겁을 잔뜩 먹고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군사들에게 ‘치라’는 지시만 거듭했다. 군사들 또한 머뭇머뭇하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장수가 그 모양이니 누구를 책하랴.

이때 조선 군사 중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두르며 앞으로 나서 적진으로 돌입하니 모든 군사들이 기운을 얻어 뒤를 따랐다. 앞장을 선 군사는 벽동의 장사 임욱경이었다. 임욱경은 적병의 초막 하나를 습격, 10여명을 베었다. 다른 군사들도 저마다 초막 하나씩 습격했다. 이러는 통에 적의 군사 중 반 정도는 잠결에 죽고, 나머지 반은 놀라서 달아났다. 이 모양으로 적병 1진은 거의 전멸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적병의 저항이 시작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적군은 예리한 군기를 들고 고함을 치며 일시에 몰려오더니, 조선 군사를 쫓기 시작했다. 이런 적병의 반격에 많은 군사가 물에 빠져 죽고 칼에 맞아 죽었다. 

재앙 부른 도원수의 꾀

▲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와 평양성을 점령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한 고언백은 배를 돌려 달아났다. 자신의 군사가 죽는 걸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다만 임욱경과 그를 따르는 몇몇 정병만 한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특히 임욱경의 충용과 검술에 수많은 적병이 맞아 죽었다. 임욱경은 끝까지 분전하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패전한 고언백은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성중城中엔 인적이 적적했다. 대동관 객사 앞까지 들어왔지만 온통 빈집뿐이었다. 고언백은 “다들 미리 달아났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을 달려 수안遂安으로 도망쳐 버렸다. 김명원 역시 좌상 윤두수에게 도망치자고 권했다. 그러면서 도망치는 ‘도리’도 설명했다. 첫째는 성문을 열고 백성에게 성을 지킬 수 없는 이유와 피난할 곳을 알리고, 둘째는 군기와 군량을 흙이나 물 속에 넣어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김명원은 좌상 윤두수에게 이런 권고를 남긴 직후 백성이 소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미리 달아나버렸다. 윤두수는 김명원의 건의대로 성문을 열고 백성들에게 피난을 지시했다. 그리곤 고관대작들은 함께 캄캄한 새벽에 보통문普通門을 나와 순안順安으로 달아났다.

윤두수의 호는 오음梧陰이다. 아우 윤근수의 호는 월정月汀이며, 한응인의 호는 백졸百拙이다. 오음은 한응인의 두툼한 얼굴 모습을 보고 세상의 복장福將이라고 생각했다. 월정은 백암 이순신을 유서애의 당파라고 오인해 미워하였다. 선조는 오음과 월정 이 두 형제를 노성인老成人이라 하면서 신임했다. 월정은 서애 유성룡보다도 6세, 오음은 10여세가 더 많았다. 선조의 대가가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렀을 때에 선조는 패도佩刀를 풀어 그 형제 두 사람에게 주며 “경의 형제는 내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하였다.

월정 윤두수는 송당松塘 유홍과 같이 당파 싸움에는 맹장이다. 김명원의 호는 주은酒隱인데, 공정하게 사람을 다뤄 도원수 권율 이상이라는 정평이 있었지만 달아나기 잘하는 버릇 때문에 욕을 먹었다. 이원익의 호는 오리梧里다. 신체가 단소했지만 유명한 재상이었다. 그가 체찰사로 한산도에 다녀온 뒤로는 백암 이순신을 천하기재라고 하여 지기지우가 되었다. 정철의 호는 송강松江이라 하고, 이덕형의 호는 한음漢陰이라 하였다.

한음 이덕형은 예조판서로 평양에서 “성상은 이미 의주에 행차하셨으니 평양에서는 세자를 옹립해 이같은 판탕(임금이나 신하들이 정치를 잘못해 어지러워진 나라의 형편을 이르는 말)의 시기에 그 옛날 당나라 숙종肅宗 황제처럼 영무지사(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일)를 행하자”라고 말했다가 “신하된 자의 입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는 핀잔만 받았다. 백사白沙는 이항복의 호다. 도승지로서 평양에 와서 병조판서에 올라 수륙군의 인사를 전형하는 권한을 장악하였다. 이때 유성룡은 서인의 조정에서 물 위 기름 같은 존재였지만 그의 아량과 경제經濟는 서인들도 신뢰하였다.

 
백성 놔두고 도망간 도원수

6월 15일 일본군은 왕성탄 여울목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습격했던 고언백의 군사들이 건너가는 걸 보고 쫓아온 거였다. 왕성탄을 지키던 평안병사 이윤덕은 적군이 여울목을 건너오는 것을 보자마자 화살 한 개도 쏘지 않은 채 성중으로 달아났다. 그것을 본 군사들도 이윤덕의 뒤를 따라 평양성중으로 몰려들어왔다.

성중에 들어온 그들은 아무도 없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밤중에 김명원의 밀서를 받은 순찰사 이원익은 이윤덕에게 말도 하지 않고 성중으로 들어와 버렸던 것이었다. 이윤덕은 윤두수, 김명원, 이원익, 송언신의 무리를 가리켜 “이 몹쓸 문관놈들!”이라고 실컷 욕하고 필마로 달아났다. 장수를 잃은 군사들도 다 흩어져 버렸다. 참으로 조선이 한심하게 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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