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버린 것도 죄다
신의 버린 것도 죄다
  • 조준행 법무법인 자우 변호사
  • 호수 131
  • 승인 2015.03.05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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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행의 재밌는 法테크
▲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은 계약을 유효하다고 믿음으로써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의무를 말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계약이 성립되려면 당사자간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계약과정에서 한쪽의 실수나 책임 있는 사유로 상대방에게 손해를 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이다. 근거는 신의성실의 원칙이다.

필자가 아끼는 후배가 있다. 얼마 전 그 후배와 점심을 함께했다. 식사 중 후배는 전날 있었던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골자는 이렇다. 후배는 자기 회사의 자동차를 인터넷에 매물로 내놓았다. 얼마 후 이를 사겠다고 연락을 해 온 대구에 사는 한 남자가 임신한 부인과 함께 후배의 사무실이 있는 수원까지 왔다. 그런데 자동차등록원부를 확인해 보니 국세체납으로 자동차에 압류가 걸려 있는 게 아닌가. 후배는 이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압류를 해결하고 나서야 매매가 가능했기 때문에 공연히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한 남자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것도 확인하지 않았느냐” “손해를 어떻게 배상할 것이냐”고 쌍스러운 욕을 해대며 후배를 윽박질렀다. 그렇다면 후배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 걸까. 후배와 대구에 사는 남자는 매매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계약 체결을 위한 준비단계에서 멈춘 것이다. 이에 따라 매매계약상의 의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계약체결 과정상의 과실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는 이론이 있다. 이른바 ‘계약체결상의 과실 책임’이다. 이는 계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았거나 계약이 무효ㆍ취소가 된 경우 또는 장래에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두터운 신뢰를 야기한 단계에서 당사자 일방의 과실에 의해 상대방에게 입힌 손해를 배상하는 제도다.

 
사례를 보자. A사가 건설계획을 수립해 건설구역 내 피조개양식장의 어업권자 B씨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B씨는 어업권 소멸에 따른 보상을 기다린 채 양식장에 피조개 종패를 살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A사가 일방적으로 건설규모를 축소 조정해 B씨의 어업권을 보상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사안에 관한 지방법원의 판결은 이렇다. “A사는 B씨의 양식장을 건설구역에 포함하고 어업권 소멸에 따른 보상금의 지급을 위해 협력하여야 할 신의칙상의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위반한 것이다.

이 경우 B씨가 자신의 어업권이 보상대상이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 준비를 위해 종패를 살포하지 못해 피조개를 생산하지 못함으로 인해 입게 된 손해, 즉 신뢰이익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 비록 계약 체결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했지만, 신의칙상의 의무 위반을 했다면 계약체결상의 과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지방법원 판결을 보자. “계약교섭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계약이 확실하게 성립될 거라는 정당한 기대 또는 신뢰를 유발하고도 타당한 근거 없이 계약교섭을 중단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계약당사자 일방이 계약의 교섭을 파기하더라도 관련 배상할 책임은 없다. 또 계약체결 이전에 가볍게 그 성립을 받은 자는 자기의 위험과 책임 하에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후배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을 소홀히 했고, 그 결과 대구에 사는 남자가 일을 못하고 먼 거리를 오는 수고를 하도록 했다. 따라서 후배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 후배는 모욕을 견뎠고, 특히 임신한 부인 앞에서 차마 싸움을 할 수 없어 참았다고 한다.
조준행 법무법인 자우 변호사 junhae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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