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매수청구권의 허점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금호산업 되찾기'가 덫에 빠졌다.[사진=뉴시스]
기업의 대표이사가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가치가 지나치게 높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의 경영진이라면 ‘우량기업’을 원할 텐데 말이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그렇다. 금호산업의 가치가 낮아지길 원하고 있어서다. 금호산업 우선매수청구권에서 비롯된 ‘박삼구의 역선택’을 취재했다.

“기업가치는 억지로 올리거나 내릴 수 없다. 채권단이 무리하지 않고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이 5월 13일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경제인회의에서 꺼낸 말이다. 박 회장의 ‘합리적인 가격’은 얼마일까. 박 회장은 “호반건설이 제시한 가격(6007억원)이 시장에서 보는 가격”이라고 말했다.

‘채권단이 무리해서 비싼 가격을 꺼내들까’ 걱정을 해서인지 박 회장은 시장이 보고 있다는 가격까지 친절하게 언급했다. 하지만 기대보다 낮아서 유찰된 6007억원을 채권단이 박 회장에게 그대로 제시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금호산업 채권단은 최대한의 차익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해서다. 시장에서는 금호산업이 아시아나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만큼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이면 1조원이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다.

금호산업의 인수가격이 높다는 건 결국 기업가치가 높다는 얘기다. 박 회장은 이 회사의 대표이사다. 보통의 경영인에게 기업 가치가 올라가는 건 반길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박 회장에게 ‘우량기업’ 금호산업은 부담스러운 듯하다. 금호산업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어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바로 박 회장이 쥐고 있는 ‘우선매수청구권의 덫’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 끝에 주력 기업을 매각했다. 이때, 우선매수청구권을 잘 활용하면 그룹을 정상화하고 주력기업을 되찾을 때 쉬워진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기업가치를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졸업할 수 있을 만큼만 올려놓고, 더 이상은 끌어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기업가치만큼 되살 때 부담이 돼서다. 하지만 매각 과정에서 기업의 가치를 낮추면 사고 나서도 탈이 날 수 있다.

금호산업이 지금 그런 상황이다. 매각이 논의되던 올해 초 시장은 금호산업 인수가를 2000억원가량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국제 유가가 급락한 데다 중국발 여객 수요 증가로 인해 항공산업이 각광을 받으면서 몸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금호산업을 사들이면 금호산업이 지분 30.1%를 보유한 아시아나항공 경영권을 저절로 확보할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금호산업을 노리고 있다는 기업 후보가 늘어갔고 시장에서 말하는 기업가치가 1조원까지 상승했다. 이런 상황은 자금동원능력이 부족한 박 회장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후 금호산업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은근슬쩍 시도돼서다. 재계 관계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관계자들이 언론을 찾아다니면서 ‘금호산업의 가치가 지나치게 높게 설정됐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며 “금호산업을 인수하겠다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낮추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덫에 빠진 건 채권단도 마찬가지다. 호반건설로부터 기대 이하의 가격제안을 받아든 채권단은 유찰을 결정하고 박 회장과 개별 협상에 돌입했다. 재입찰에서 흥행 여부를 장담할 수 없고 박 회장이 우선매수청구권을 갖고 있는 만큼 빠른 매각이 진행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서 M&A 거래에서 핵심 요소인 인수후보자 간 가격경쟁이 배제되고 말았다. 박 회장이 원하는 ‘합리적인 가격’은 정말 합리적일 수 있을까.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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