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본 낙하산의 폐해

▲ 세상이 어려우면 늘 ‘낙하산’이 말썽을 일으켰다.[사진=아이클릭아트]
“험지險地에 ○○○를 내려보내겠다.” 되묻는다. “그럼 뭐? ○○○를 내려보내면 살림살이가 좋아지나.” 총선이 다가오자 정가가 또 들썩인다. 정권 초반 ‘낙하산 인사’를 핏대 높여 비판했던 금배지들이 지금은 ‘낙하산 공천’을 하느라 정신머리가 없다. 역사에서 ‘낙하산’의 폐해를 살펴봤다.

때는 1478년(성종 9년). 새해 벽두부터 흙비(황사)가 매섭게 내렸다. 때아닌 지진도 일어나 조선의 작은 땅이 온통 뒤흔들렸다. 그야말로 천재지변이었다. 막 왕위에 오른 성종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내가 국정운영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천재지변 등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는 까닭을 국왕, 관료의 무능에서 찾았다. 이 때문에 국왕은 천재지변을 없애기 위해 음식 수를 줄이고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고 한다.

성종이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고 있을 무렵. 도승지(비서실장) 임사홍이 이상한 주장을 늘어놓았다. “시절의 운수가 마침 그런 것이기 때문이니 국왕은 재이災異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사홍이 시대를 뛰어넘는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성종 시대의 권력층 ‘훈구파’의 일원이었다. 천재지변의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전전긍긍하다가 성종에게 ‘거짓부렁’을 전한 것이었다.

지금은 늘 있는 일이지만 임사홍은 ‘거짓말 보고’ 후 수많은 사대부의 표적이 됐다. 온갖 비난의 화살이 그의 몸에 꽂혔던 것이다. ‘화’를 피할 요량으로 사대부의 덕목인 명예를 버렸다는 게 이유였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파직도, 죽음도 아니었다. 강직함과 명예였다. 국왕에게 진언하지 못한 관리들은 종종 ‘폄론貶論(남을 깎아내려 헐뜯음)’을 당했는데, 임사홍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명예를 중시한 탓에 부정한 방법으로 관리에 임용되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조선은 ‘깜도 안 되는’ 낙하산 인사들이 감히 활개를 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조선시대의 관리임용 절차는 무척 까다로웠다. 관리 후보에 대한 인물 검증도 철저하게 이뤄졌다. 낙하산 인사가 발을 붙일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는 도목정都目政(정기인사)이나 공석이 생겼을 때 해당 관직의 적임자를 추천했다.

대개 후보자 3명을 왕에게 보고했는데, 이를 ‘삼망三望’이라고 한다. 국왕은 후보 3명 중 한 명의 이름에 점을 찍어 적임자를 결정했다. ‘낙점落點’이라는 단어의 근원이다. 하지만 낙점이 곧 ‘합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헌부ㆍ사간원 등 대간은 국왕이 낙점한 후보를 꼼꼼하게 검증했다. 본인은 물론 조상의 흠결까지 샅샅이 훑었다고 한다. 이런 검증 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제아무리 국왕이 낙점한 후보라도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이는 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견제함과 동시에 실무자들의 정실인사를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로 보인다.

왕도 마음대로 못한 임용

하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치가 불안정하면 낙하산 인사가 기승을 부렸다. 수양대군(세조)이 실권을 잡은 계유정난(1453) 직후, 낙하산 인사가 속출했던 것은 단적인 사례다. 계유정난의 주역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권력을 이용, ‘백두’에서 핵심 권력층으로 부상했다. 수양대군의 처남, 한명회의 동생 한명진, 6촌 동생 한명구, 천인 출신 임자번도 계유정난의 공적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봉되는 영예를 누렸다. 계유정난으로 조선시대 초유의 낙하산 부대가 탄생한 셈이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옹립된 사건인 중종반정中宗反正(1506) 직후에도 논공행상이 판을 쳤다. 중종 반정의 애초 공신은 101명. 하지만 어느샌가 117명까지 늘어났는데, 대부분 뇌물 때문이었다고 한다. 뒷거래로 공신 대열에 합류한 사람이 그만큼 많았던 것. 또 공신들의 능력 없고 비루한 친인척들도 대거 공신 책봉을 받았다. 반정의 주역 박원종 일가에선 사촌 박이검, 박이온, 생질 한세창, 한숙창, 이맹우, 처남 윤여필 등 총 6명이 공신 반열에 올랐다.

▲ 안대희 전 대법관의 서울 마포갑 출마선언 기자회견을 방해하는 강승규 마포구 당협위원장 지지자. 20대 총선이 벌써부터 ‘낙하산 공천’으로 얼룩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유순정 일가에서도 아들 유홍을 필두로 조카 유영과 생질 등 7명이 공신에 책봉됐다. 또 다른 중종반정의 일등공신 성희안 일가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들, 동생, 조카, 매부, 이종사촌, 사돈 등 6명이 ‘공신 배지’를 달았다. 1519년 조광조가 ‘위훈(공 없이 책봉된 거짓 공신) 삭제 운동’을 일으켜 117명의 공신 중 76명의 자격을 박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낙하산 인사에 대한 조광조의 처단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낙하산 인사들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았다. 세조 시절, 대표적 낙하산 인사로 손꼽히는 홍윤성의 일화 한 토막. 세조가 온양온천에 가기 위해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한 아낙네가 버드나무 위에서 통곡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발걸음을 멈춘 세조는 “자세히 알아보라”는 영을 내렸다. 하지만 아낙네는 한사코 국왕 아니면 말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공신들의 말은 한 걸음 뗄 때마다 달라진다”는 게 입을 꽉 다문 이유였다.

우여곡절 끝에 국왕 앞에 당도한 아낙은 자신이 홍윤성의 숙모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전횡을 낱낱이 고했다. “…홍윤성이 백두였을 때 숙부인 내 남편이 그를 보살폈습니다. 그런데 공신이 되고 난 뒤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이제는 가진 땅을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낙하산 인사 홍윤성의 횡포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낙하산들’ 횡포와 전횡 일삼아 

후한後漢 때 장안에선 “양의 위장 굽는 사람이 기도위(황제를 호위하는 기병의 관직)가 되고, 양머리 굽는 사람이 관내후(조정의 녹을 받는 사람) 됐네”라는 뼈 있는 농담이 떠돌았다고 한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높은 관직을 멋대로 차지하는 세태를 풍자한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실은 지금도 여전하다. 정권이 바뀌면 ‘낙하산 인사’가 황금줄을 달고 관가에 내려온다. 공공기관에도 정권을 만드는 데 일조한 ‘공신’이 득실댄다. 요즘은 ‘총선’에서도 낙하산 공천 때문에 난리다. 특히 대통령의 지역구나 다름 없는 대구에는 ‘친박’을 자처하는 인사들로 넘쳐난다. 역사에서 보듯 ‘낙하산 인사’는 백성을 고달프게 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총선을 맞은 금배지들도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수진 더스쿠프 문화전문기자 pen7355@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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