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차에 사연 담으니 눈물이 됐다
폐차에 사연 담으니 눈물이 됐다
  • 김다린 기자
  • 호수 184
  • 승인 2016.03.2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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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마케팅의 경제학

“자동차는 이제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다.” 최근 자율주행차, 전기차, 커넥티드카 등 첨단 기술이 접목된 차를 설명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첨단기술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자동차는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첫 출근길을 함께 해준 고마운 동료였고, 누군가에게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향수가 남아 있는 사진첩이었다.

▲ 현대차와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이 '브릴리언트 메모리즈:동행'이란 이름의 자동차 전시회를 개최했다.[사진=지정훈 기자]

매년 글로벌 완성차 회사들은 자동차 전시회를 통해 저마다의 첨단 신기술을 뽐낸다. 최근에는 운전자의 조작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주행차가 시연되기도 했다. 가솔린ㆍ디젤 같은 화학연료 대신 전기를 동력으로 삼은 친환경차는 이미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여기에 사물인터넷(IoT)이 결합된 커넥티드카까지 등장했다. 자동차 대시보드에서 집 안팎의 상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회사 업무를 볼 수도 있다. 자동차는 더 이상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다. 달리는 종합생활공간이다.

이런 맥락에서 3월 21일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자동차 전시회 ‘브릴리언트 메모리즈(brilliant memories):동행’은 이목을 끌었다. 첨단기술의 스마트카가 아닌 시동을 걸기도 버거운 폐차를 전시회의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역주행’을 한 셈인데, 북서울미술관은 폐차를 앞두거나 중고차로 팔려갈 자동차에 인문학적 스토리를 담아 미술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단순한 폐차는 아니다. 미술관에 전시된 폐차에는 차주車主의 사연이 담겨 있다. 13명의 현대미술 작가가 차주의 사연을 하나씩 맡아 이야기를 완성하고 의미를 부여해 작품을 제작했다. 사연이 많았던 만큼 작품도 다양하게 나왔다. 작품의 형식도 설치 미술,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등으로 자유분방했다.

가족의 생계 수단으로 빚을 갚고 집을 장만할 수 있게 도왔던 정혜란씨의 포터는 설치 작품으로 거듭났다. 박문희 작가의 ‘사막에서 핀 생명’이다. 강화 플라스틱 위에 자동차 부품을 늘어놓고, 그 위에 초록색 천을 걸어 사막에 움튼 식물을 표현했다.

이른바 ‘탈것’에서 꿈과 행복을 담은 공간으로 변모한 자동차도 있다. 이주용 작가의 ‘창 너머의 기억’이다. 6인승 그레이스 자동차에 아내와 자녀를 태우고 즐거운 추억을 만든 안익현 씨의 사연을 소재로 삼았다. 좌석을 조화와 깃털로 가득 채우고 홀로그램 영상을 투영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할부로 산 승용차 엑센트를 23년간 몰고 다닌 40대 가장의 사연도 인상 깊게 다가온다. 김상연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길’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차체부터 계기판, 기어까지 엑센트의 부품을 뜯어낸 후 뫼비우스 띠 형태로 구성했다. 박재영 작가의 ‘다운라이트 메모리 시뮬레이터’의 사연은 더욱 아련하다.

▲ ①'브릴리언트 메모리즈:동행' 전시 전경. ②현대차 '그레이스'를 재가공한 이주용 작가의 '창 너머의 기억'.[사진=지정훈 기자, 북서울미술관]

작가는 암투병 끝에 돌아가신 사연자의 어머니가 몰던 1998년식 쏘나타3를 ‘기억환기장치’란 이름으로 재탄생시켰다. 기어모터와 엔진, 멀티채널영상을 조합해 제작한 이 작품은 와이퍼의 움직임과 창 위에 투사된 풍경, 작게 울려 퍼지는 실내 라디오 소리, 빗물냄새, 어머니의 화장품 향기 등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폐차에 담긴 의미 있는 사연

첨단기술로 나날이 발전하는 자동차 업계에 이 폐차 전시회는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답은 이 전시회의 또 다른 주체로부터 찾을 수 있다. 바로 글로벌 완성차 기업인 현대차다. 조원홍 현대차 마케팅사업부 부사장은 “첨단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이 느끼는 편의성이 개선될 수 있지만 인간의 능력이 무력화될 수도 있다”면서 “이런 때일수록 아날로그적인 인간 본연의 감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전시회 기획 이유를 설명했다.

‘자동차=삶의 모습이 집약된 이동수단 이상의 가치’란 등식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건 첨단기술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시 작품에 실제 고객들의 사연을 담은 건 이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의 부제가 ‘동행’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예술로 고객 마음 움직이다

현대차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고객과 소통하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대차는 ‘불통不通 이미지’가 강했다. 고객들의 비판적인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다는 쓴소리도 많이 들었다. 이는 번번이 현대차 브랜드를 훼손하는 변수로 작용했고, 판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시점에서 현대차의 적극적인 문화 마케팅은 훌륭한 ‘반전 카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다양한 주제로 꾸민 전시공간에서 소비자들이 현대차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다.

실제로 현대차의 문화 마케팅 카드는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 현대차가 참여자 33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시 현장 설문 조사 결과, ‘전시 콘텐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86%)’ ‘전시회를 지인에게 추천할 의향이 있다(88%)’ ‘차기 캠페인 진행 시 참여할 의향이 있다(87%)’ 등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현대차의 ‘감성 소통’이 고객들에게 감동을 줬다는 얘기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번 전시회는 자동차를 통해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되짚어 함께 소통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열게 됐다”며 “앞으로도 자동차를 딱딱한 사물이 아닌 문화 콘텐트로 승화할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낡은 고물차가 고객의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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