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곡성 ❸

영화 ‘곡성’은 우리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수많은 믿음의 비합리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평화롭던 마을에 우리의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합리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당연히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당황한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 종구는 효진이 '일본놈' 때문에 이상 증세를 보인다는 비합리적 판단을 내린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마을 주민들의 비합리적인 의심은 일본의 외지인(쿠니무라 준)에게로 향한다. 일본 외지인은 사람이 아닌 귀신이며 악마의 주술사라는 대단히 비합리적인 용의자가 된다. 귀신으로 몰린 외지인은 주민들에게 의미심장한 자기변론을 한다.

“내가 누군지 내 입으로 아무리 말해도 너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넌 내가 악마라는 의심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 날 만져보아라. 영靈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보는 것처럼 모두 있다.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예수의 12제자들이 예수의 뼈와 살을 보고 만져보고서야 그의 부활을 믿었다고 하지만 12제자들은 어쩌면 예수의 부활을 원했기에 뼈와 살이라는 실체를 접하고 믿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죽은 자가 3일 만에 무덤을 열고 살아 돌아오는 ‘있을 수 없는 일’도 믿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믿고 따랐던 예수의 죽음으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던 12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믿고 싶은 일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예수의 부활을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도마처럼 예수의 손발의 대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해 봐도 그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 곡성이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은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다. 평화롭던 마을에 느닷없이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의 원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버섯 섭취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버섯에 대한 합리적 의심 대신 수상쩍고 괴이한 외지인에게 ‘비합리적 의심’을 퍼붓는다.

외지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비합리적 의심에 합리성을 부여한다. ‘이방인 공포증(Xenophobic)’은 비합리적이지만 합리화된 두려움이다. ‘왜놈들의 도래는 재앙’이라는 인식도 비합리적이지만 합리적이기도 하다.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등장인물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마을의 경찰관 종구(곽도원)도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에서 정신없이 방황한다. 종구는 애초에는 기괴한 사건의 원인이 버섯 복용이라는 당국의 합리적인 설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어린 딸 효진(김환희)이 그 ‘일본놈’을 만나고 이상증세를 보이자 비합리적으로 돌변한다. 일본에서 온 귀신의 저주 때문에 딸이 미쳐간다는 무척 비합리적인 진단을 내리고 굿판이라는 역시 비합리적인 처방을 내린다.

▲ 조기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를 둘러싼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린다.[사진=뉴시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상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실증주의는 합리적인 인간들의 전유물일 뿐이지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지는 않는다. 믿고 싶지 않으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져도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고, 믿고 싶으면 눈에 안 보이고 만져질 수도 없는 것도 철석같이 믿는 것이 인간이다.

자신들이 열광했던 한 정치지도자의 급격한 몰락을 지켜보는 지지자들의 정신적 공황은 예수의 죽음을 맞은 12제자들의 공황과도 같은 모양이다. 그의 정치적 스캔들을 믿고 싶지 않다. 합리적 의심을 거부하고 비합리적 믿음을 사수한다.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모든 자들과 보도를 비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믿는 자들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반향실(反響室ㆍecho chamb er)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기꺼워하고 ‘가짜 뉴스’도 제작하면서 전의戰意를 불태운다.

하버드대학 자연과학역사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서 고착화된 하나의 신념체계가 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그 오류를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제시돼도 고착화된 신념체계는 쉽게 붕괴되지 않는다. 한번 자리 잡은 ‘천동설’은 관측기술을 발달을 통해 그 오류가 속속 증명돼도 쉽사리 ‘지동설’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온갖 궤변과 권위를 동원해 연명했다.

비합리적인 의심과 비합리적인 믿음들이 온 나라에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은 있다. 토마스 쿤은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어느 정도까지는 늘어날 수 있지만 계속 당기면 더이상 늘어나지 못하고 한번에 끊어지는 순간이 온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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