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구조조정 잔혹사

1997년 외환위기. 정부는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그렇게 20년이 훌쩍 지났다. 글로벌 시장의 생태계가 바뀌고 기업들의 경영 방식도 달라졌다. 그런데 바뀌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정부가 구조조정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점이다.

▲ 정부 주도 구조조정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사진=뉴시스]

기업 구조조정. 기업의 경쟁력을 올리기 위해 조직을 변경하거나 사업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기업 경영을 개편하는 걸 말한다. 기업은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축소ㆍ철수하거나 인수ㆍ합병(M&A) 시장의 매물로 내놓고 보유 자산을 매각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인력 감축이 포함되기도 한다. 대개는 경영 상황이 좋지 않거나 부실한 기업이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런데 기업 구조조정의 메스를 든 이가 금융당국과 채권단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업에 자금을 빌려준 채권단은 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구조조정에 참여한다. 금융당국은 기업 부실의 불씨가 국가 경제와 금융 시스템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명령한다.

흥미로운 건 우리나라 기업 구조조정의 역사에서 채권단과 금융당국의 이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에 기업 구조조정이 도입된 시기가 1997년 외환위기라서다. 당시 부실 대기업들은 외환위기를 불러온 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몸집 불리기를 하다가 금융권에 부실을 옮기고 한국경제의 신뢰를 떨어뜨렸다는 거다.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삼미그룹, 청구그룹, 해태그룹, 한라그룹, 진로그룹 등 유명 재벌기업이 이때를 계기로 모두 망하거나 해체됐다.

정부는 ‘대기업의 몰락’이 익숙하지 않았다. 서둘러 남은 기업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금융당국의 몸통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우리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권고로 금융감독위원회를 발족했다. 이 기관의 감독 아래 시중은행과 산업은행이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때 실행한 대표적인 전략이 빅딜이다. 대기업끼리 서로 사업을 주고받아 중복투자를 해소하고 업종 전문화를 유도하자는 거다. 삼성전자ㆍ현대전자ㆍLG반도체 등 3사가 참여하던 반도체 사업은 현대전자와 LG 간 빅딜을 통해 삼성전자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2사 체제가 됐다. 정부의 압박으로 이뤄진 빅딜이었다. 물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LG반도체를 떠안은 현대반도체는 인수 대금을 치르느라 자금난에 빠졌고 곧 이어진 반도체 업계 불황에 10조원의 빚을 지고 침몰했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정부가 국내 구조조정의 주체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자율협약,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작업) 등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이 완전히 ‘공식’이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이 공식은 그대로 적용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동양그룹, 웅진그룹, STX그룹 등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거나 법정관리를 밟았다. 이때마다 막대한 혈세만 투입됐지만 경영 정상화에 다다른 기업은 많지 않았다. STX조선해양은 정부가 6조원을 퍼붓고도 살리지 못했다.

칼자루를 쥔 정부가 엉뚱한 곳에 휘두르는 현실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두고 저울질하던 정부는 현대상선을 택했다. 한진해운은 파산했는데 이번엔 현대상선의 경쟁력에 물음표가 붙는다. 대우조선해양에는 4조원을 쏟아 붓고 ‘더이상 지원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막대한 적자를 내서 추가 지원을 검토 중이다.

역설적으로 이번 지원은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정부는 산업의 이해도가 낮다. 구조조정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치중되고 그 방법론은 처분, 매각, 공적자금 지원으로 국한됐다. 냉정한 원인분석이 빠진 의사결정을 정치논리로 강요하기도 했다.

윤석헌 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는 “시장의 자정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정부 지원에 의존한 한계기업의 지속은 정상기업의 이윤 축소와 투자 및 고용의 위축을 가져온다”면서 “기업 퇴출이 시장 원리에 따르도록 사전적인 정부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구조조정 전문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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