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끓여 먹던 라면의 맛

# 어릴 때 전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유는 두개였던 것 같습니다. 아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산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것. 그때만 해도 산에서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이었죠. 

# 막 10살이 됐을 때로 기억됩니다. 등산을 가는 날인데 아빠는 가방에 코펠과 버너를 챙기지 않으셨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저에게 아빠는 “이젠 라면을 끓여먹을 수 없다는구나”라면서 기사 한토막을 읽어줬습니다.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계곡이나 정상부 가리지 않는 취사 인파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중략)…이어 1990년 11월 15일 지정된 장소 외의 취사 및 야영금지조치를 전국 14개 공원 39개소에서 전격 시행했다    -국립공원공단 역사 아카이브 발췌-

#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랑 끓여먹던 라면의 맛을 더이상 느낄 수 없다니요. 어린 나이에 참 속이 상했습니다. 산에 가기 싫다며 떼도 좀 부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취사금지는 합당한 결정이었지만, 어렸던 제가 그걸 알 리 없었죠. 

# 오랜만에 키즈카페에 갔습니다. 우리집 삼남매는 머리가 다 젖을 정도로 신나게 뛰어놉니다. 문득 창밖을 보니 저 멀리 북한산이 보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와 다니던 그 산입니다. 아직 눈이 그대로입니다. 구름 낀 하늘 사이로 간간이 내리쬐는 햇빛에 노랗게 반짝입니다. 장엄한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 키즈 카페에 붙여놓은 안내판에 눈길이 갑니다. ‘외부음식 반입금지’. 순간 아빠가 읽어준 계곡이나 산에서 취사금지란 기사가 귀를 울립니다. 옛 생각이 떠올라 잠시 추억에 젖습니다. 그때 얼굴이 땀으로 범벅된 1·2·3호 아이들이 나타납니다. 

# “아빠, 우리 음료수 좀 사주면 안돼?” 신나는 얼굴로 과자와 음료수를 먹는 아이들을 보니 참 이쁩니다. 문득 산에서 라면을 호호 불어 먹던 절 지그시 바라보시던 아빠 생각이 납니다. 오늘은 집에서 라면을 먹어야겠습니다. 집에선 취사금지도 반입금지도 없으니까요. 

사진·글=오상민 천막사진관 사진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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