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8
출정 여부 신중하게 판단한 순신
명령 불복종이라 우긴 서인과 북인
조선에 거짓 정보 흘린 간첩 요시라
간신들 말만 믿고 처벌 내린 선조
파직함과 동시에 체포 명령 내려

# 이순신은 별별 모함을 다 당했다. “가등청정 등 왜국 장수에게 뇌물을 바쳤다” “뇌물을 받고 왕의 명령을 어기고 출정하지 않았다” 등 모함의 내용도 다양했다. 문제는 임금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향한 모함 대부분을 믿었다.

# 자고로 지도자는 좋은 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진언眞言과 간언間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공천’으로 시끄럽다. 여야 지도자는 과연 진언과 간언하는 사람을 잘 가려서 총선 무대에 올려놓고 있을까.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다양한 의견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다양한 의견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난중일기」에는 1596년(병신년) 10월 12일부터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기 직전인 1597년(정유년) 3월 말까지의 기록이 없다. 이순신에겐 어려움이 많았던 시기다. 이 기간 그의 행적은 타인의 기록이나 후일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소서행장과 첩자 요시라의 술수는 결국 성공을 거둔다. 추정컨대, 선조가 비변사 부제조 황신을 한산도로 내려보낼 당시의 속내는 ‘장졸을 위로하는 것’보다 ‘부산으로 건너오는 가등청정을 요격할 것’에 무게를 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순신이 출정 여부를 신중하게 판단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순신의 논리는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비록 반목한다고는 하나 원정 대상인 조선에 군사 비밀을 누설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 비밀을 누설한다면 역적죄에 해당된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철없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풍신수길의 휘하에서 신임을 받는 명장이다. 결코 그럴 리가 없다. 

둘째, 높은 파도가 예상되는 한겨울의 망망대해에서, 그것도 적이 이동하는 날짜도 확신할 수 없는데 무작정 가등청정의 병선을 막으라 하는 것은 음흉한 계책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선이 대규모 병선을 이끌고 부산으로 이동할 경우, 적에게 모두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셋째, 이미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부산 지역에 조선 수군이 정박할 수 있는 마땅한 항구가 없다. 따라서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부산을 등지고 부산으로 건너오는 적을 요격하기보다는 지리의 특성, 조수의 순역 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유리한 점을 활용해 대응하는 게 효과적이다.   

넷째, 적이 제아무리 많은 병선을 끌고 오더라도 한산도를 점령하지 못하면 제해권을 확보할 수 없다. 아군은 요충지를 견고히 지키면서 기회를 봐서 적을 격파해야 한다. 다섯째, 설사 큰 바다에서 싸워 적을 격파하더라도 적은 왜국 방향으로 달아날 것이다. 추격한다 해도 왜국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기에 얻을 소득이 없다. 또한 아군이 전투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일 경우, 후방에 있던 부산의 적들이 합세해 협공하면 승산이 없다. 

여하튼 황신이 이순신에게 직접 출동 명령서를 전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속임수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삼도수군을 출동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소식에 한양의 서인과 북인 중심의 고위층들이 선동에 나섰다. ‘명령 불복종’이라고 우기면서 선조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런데 요시라의 정보는 이순신이 예상했던 대로 거짓이었다. 가등청정이 1597년(정유년) 1월 7일 대마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1월 12일 150여척을 이끌고 울산의 서생포에 도착했다. 14일에 상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무렵 도원수 권율은 상황파악이 늦었다. 권율은 1597년 1월 21일 한산도 진중에 들어와 이순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등청정이 근일에 나온다 하니 공은 요시라가 알려 준 대로 가등청정을 사로잡으시오.” 권율은 이순신이 내막을 설명할 틈도 없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한산도 진영을 떠났다.

이순신은 권율의 명령을 받들어 간첩 요시라가 지목했던 부산 앞바다를 향해 출발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소서행장과 요시라는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가등청정은 이미 조선 땅에 상륙했다. 그런데 이순신이 가덕도까지 와서 가등청정을 사로잡지 아니하고 일부러 놓아줬다. 이순신에게 뇌물과 폐백을 많이 보냈다.” 

김응서는 요시라의 이같은 말을 믿고 대번에 권율에게 보고했다. 권율 역시 그 말을 믿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모해했다.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순신을 베어야 한다”는 상소가 하루에도 3~4차례씩 올라왔다.

원균의 후원자인 윤두수는 ‘망상요공지죄(임금을 기망하고 공을 얻으려는 죄)’로 상소했다. 윤두수의 아우 윤근수는 ‘종적해국지죄(적을 따라 나라를 해치려는 죄)’라고 몰아세웠다. 박성이란 인물의 상소는 특기할 만하다. “적장 가등청정을 용략으로 능히 잡을 수 있는데도 뇌물을 받고 놓아줬으니 매국의 죄로 다스려 처참하소서.”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몇차례 회의를 열었다. 그때마다 이순신의 공명을 시기하던 서인과 북당의 인물들은 이유도, 사실도 따지지 않고 이순신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경림군 김명원은 “이순신은 정대한 사람이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우의정 이원익은 좀 더 자세하게 이순신을 향한 평판을 내놨다. 첫째로 검소하고 사졸과 고락을 함께하는 점, 둘째로 군법이 엄숙하고 군령이 간명한 점, 셋째로 지휘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 넷째로 청렴하다는 점을 들면서 이순신을 잘 감독하면서 관리하자고 설득했다.  

“지금은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강력한 처벌의사를 내비쳤던 선조는 일단 결론을 미루기로 했다. 대신에 성균관 사성司成 남이신南以信을 암행어사로 한산도로 파견, 내막을 염탐해오도록 했다. 성균관 사성은 요즘으로 따지면 당파관념을 초월한 대학교의 교수 격으로 남이신은 뛰어난 한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입신양명을 밝히는 인물에 불과했다. 백성과 장졸들이 남이신에게 ‘통제사가 공정하고 애국심 높은 인물’이란 점을 아뢰고 호소했으나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남이신은 이순신에게 벌을 주고 싶어 하는 선조의 뜻을 받들고 벼슬이나 차지하면 그만이란 생각에 사고를 치고 만다. 한산도에 들렀지만, 통제사는 아예 만나 보지도 않고 부랴부랴 한양으로 돌아갔다.

그가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은 이랬다. “적장 가등청정은 병선 한척만을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다가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조그마한 절해고도에서 7일 동안 묶여 있었다. 소서행장은 곧 요시라를 이순신에게 보내 가등청정을 사로잡기를 독촉했으나 순신은 가등청정의 뇌물을 받고 요시라의 말을 불청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향한 모함을 모두 믿는 우를 범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선조는 이순신을 향한 모함을 모두 믿는 우를 범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요시라는 이순신의 진중에는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권율, 김응서 등은 쉽게 속일 수는 있으나 이순신의 경우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섣불리 갔다가는 효수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남이신의 보고에 이순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폄훼하고 모함했던 자들은 ‘임금을 속인 죄, 적을 쫓지 않은 죄’로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조도 이미 처형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재침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이순신을 죽이면 손해’라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논란 끝에 1597년 2월 6일 이순신을 파직함과 동시에 체포하란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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