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5편
4년간 이어진 명‧왜 강화협상
풍신수길 일본 왕 책봉이 화두
풍신수길 책봉 동의 강요한 명
일본 국왕 책봉식 거행됐지만
강화회담 결렬 선언한 풍신수길
왜의 전략에 놀아난 조선과 명
재침 준비 시간만 준 강화협상

테이블 위에서 치러지는 ‘협상’은 피상적이다. 진짜 싸움은 테이블 밑에서 이뤄진다. 누가 속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득을 취하느냐가 싸움의 핵심이다. 명나라와 왜나라는 1593년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둘 모두 딴생각뿐이었고, 제3국인 조선은 손해만 봤다. 그만큼 대외 협상은 중요하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외국과 맞닿아 있는 한국은 지금 현명한 외교 전술을 펴고 있을까. 

협상은 본심을 숨긴 채 이득을 취해야 하는 싸움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협상은 본심을 숨긴 채 이득을 취해야 하는 싸움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4년간 지루하게 이어지던 명나라와 왜나라의 강화협상은 외견상으론 풍신수길의 ‘일본 왕 책봉’이 화두였다. 명나라는 여기에 맞춰 마침내 1596년 6월 왜나라로 책봉사절을 보냈다. 이때 책봉정사는 양방형, 부사는 심유경이었다.  

명나라는 책봉 사절단을 파견하기에 앞서 조선 조정에 풍신수길의 책봉에 동의할 것을 강요했다. 1594년 4월,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은 조선 조정을 향해 “조선은 풍신수길을 일본의 왕으로 책봉하는 것을 원한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명나라 조정에 전달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나 전쟁에서 명나라의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조는 주청사 허욱을 명나라에 보내 “명나라가 풍신수길을 일본 왕으로 책봉해줄 것을 요청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2년이 지난 후, 석성의 부하 심유경은 명나라의 책봉부사로 임명되자마자 조선 조정에 통호사通好使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했다. 말이 수행이지 책봉사절을 보내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과정 끝에 선조는 결국 황신黃愼을 책봉정사로, 대구부사 박홍장朴弘長을 책봉부사로 임명했다. 조선의 책봉사절단은 마침내 1596년 8월 5일, 부산에서 왜나라를 향해 출발했다. 

황신은 심유경이 조선의 왜군 진영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의 접반관을 맡아오면서 명·일 화친에 반대한다는 조선 조정의 입장을 줄곧 전달해왔던 인물이다. 반면, 심유경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수많은 기만행각을 벌이다 결국은 명나라에 끌려가 참수를 당한 인물이다.

애초에 명나라 책봉사절 종사관에 불과했던 그는 1593년 5월 9일, 묘한 술수로 책봉정사를 비롯한 일행을 부산에 남겨 두고 자신만 소서행장 일행을 따라 왜나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현지에서 명나라의 책봉사절단 핵심 인물처럼 행세했다.  


개인적으로 가져간 명나라의 문관 예복을 입고 다니며 덕천가강, 모리휘원 등 풍신수길의 부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뇌물을 챙겨줬다. 풍신수길에게는 망룡포(곤룡포), 옥대, 익선관, 명나라 지도, 무경칠서를 자신의 개인 명의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환심을 얻은 그는 현지의 미녀를 시첩으로 얻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명나라의 책봉정사 이종성은 울산의 왜군 진영에 머물며 심유경과 소서행장이 조선으로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오면 조선 남해안에 둥지를 틀고 있던 왜군들이 모두 철수할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종성에게 황당하고 끔찍한 내용의 서신이 도착했다. 왜국에 머물고 있던 이종성의 지인이 보낸 편지였다. “오사카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복견성伏見城의 궁궐이 무너졌고, 이로 인해 궁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풍신수길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기로 태도를 표변하였다 합니다. 귀하가 만일에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오면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심유경도 옥중에 감금돼 있어서 벌써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심유경의 계략이었다. 이종성은 명나라 개국공신 이문충의 자손으로 임회후라는 후작을 대대로 이어받고 있었던 터라 장사꾼 출신인 심유경을 하대하며 가볍게 취급했다. 이런 이종성에 앙심을 품은 심유경은 그에게 복수할 심산으로 이 같은 사기극을 꾸며낸 것이다.  

서신을 받아 보고 잔뜩 겁을 먹은 이종성은 왜나라에 건너갈 마음을 접고 1596년 4월 3일 한밤중에 조선 땅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진영에서 줄행랑을 쳐버렸다. 이 보고를 받은 명나라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당시 부사였던 양방형을 책봉정사로 임명했다. 이때 심유경은 책봉부사의 자리를 꿰차고 강화협상의 명나라 측 실세 노릇을 했다.  

마침내 1596년 9월 2일, 오사카에서 풍신수길의 일본국왕 책봉식이 거행됐다. 덕천가강, 모리휘원 등 제후들이 도열한 가운데 풍신수실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다. 풍신수길은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로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명나라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지 않기 위한 핑계였다.

이때 심유경은 풍신수길의 앞에 나아가서 명나라 황제가 보내온 금으로 된 일본왕 인장과 왕복을 건넸다. 또한 풍신수길의 신하 가운데 덕천가강·직전신웅·전전리가·모리휘원·부전수가·상삼경승·소조천수추·흑전효고·생구친정·중촌일씨 등 10명에게는 도독이라는 관작을 부여했다.

더불어 굴미길청·천정장정·증전장성·석전삼성·협판안치·도진의홍·소조천융경·가등청정·소서행장·구귀가륭 등 10명에게는 아도독, 장속정가·전전현이·흑전장정·과도직무·이달정·장종아부원친·가등광태·종의지·가등가명·대우의통·송포진신·등당고호·봉수하가정·입화종무·천야행장을 비롯한 15명에게는 도지휘사, 기타 15명에게는 아지휘사의 관작과 인장을 주고 관복과 칙유문勅諭文을 전달했다.

이어 풍신수길의 수행 승려 서소승태西笑承兌(사이쇼 조타이)가 책봉조칙이 담긴 명나라의 국서를 읽어 내려갔는데, 이때부터 책봉식 분위기는 험악하게 돌변했다. 명나라와 휴전을 조건으로 내건 풍신수길의 요구사항 중 책봉 외에는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신수길은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당장 명나라의 사신들을 참수하라. 또한 그동안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추진해온 소서행장도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자리에 참석한 왜장들의 만류로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음날, 풍신수길은 명나라의 책봉사절을 불러놓고 강화회담의 결렬을 선언하고 사절단의 추방을 명령했다. 그리고 수하들에게는 재침 준비령을 내렸다. 

이 장면을 두고 여러 설과 주장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풍신수길과 그의 수하들이 잘 짜놓은 각본대로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와 조선은 이에 농락당한 것일 뿐이다. 통찰의 이순신은 이미 그동안 수집한 첩보와 정보를 통해 반드시 왜군이 다시 침략할 것으로 확신한 바 있다.  

명·왜 강화협상은 결국 왜국에 재침 명분만 제공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명·왜 강화협상은 결국 왜국에 재침 명분만 제공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명나라와 왜나라의 강화협상은  1593년 6월의 2차 진주성전투 이후 다시 수면위로 부상했다. 이때 왜적의 요구사항은 대략 이렇다. ▲풍신수길의 일본국왕 책봉, ▲명나라 공주를 풍신수길에게 시집 보낼 것, ▲교역과 조공 허락, ▲조선의 땅(8도) 절반인 4도를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 또는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 ▲조선의 영원한 항복 등이다. 조선과 명나라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반면 명나라는 ▲왜군의 전면 철수, ▲사죄문 제출, ▲조공 불가, ▲책봉 가능 등을 내세웠는데 이 또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사항이었다. 4년 동안의 강화협상은 결국 왜적에게 재침(정유재란)을 준비할 시간을 제공하는 꼴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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