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9
원균 잘못 인식한 선조의 오판
순신의 장계 거짓으로 판단 조정
1597년 2월 이순신 파직한 선조
10여명의 체포조 내려보낸 선조
순신 체포에 울분 터뜨린 백성들

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참을 거짓으로 알았든, 거짓을 참으로 알았든, 사실관계를 오인했으면 바로잡으면 된다. 지도자도 예외여선 곤란하다. 부서, 회사, 정당, 더 나아가 국가의 지도자라면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쉽게도 이순신을 미워했던 선조는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네 지도자는 어떨까.

완전무결한 리더는 없다. 얼마나 솔직하냐가 중요할 뿐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순신은 결국 ‘잘못된 정보로 인한, 잘못된 발끈에 따른, 잘못된 뒤끝 작렬’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그의 파직에는 복합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부산의 적 진영에서 일어난 화재를 빼놓을 수 없다. 원균을 잘못 인식한 선조의 오판과 적이 꾸며낸 반간계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이순신은 1597년(정유년) 1월 1일,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1596년(병신년) 12월 12일에 (아군이) 왜군 진영에 불을 놓아 적의 가옥 1000여채와 군기 및 잡물, 화포, 기구, 군량 등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중략) 믿을 만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럴 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안위, 김난서, 신명학 등이 성심으로 힘을 다해 일을 성공시켰습니다. 매우 가상하며, 앞으로 대처할 기밀의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니 각별히 논상해 이들을 격려하소서.”

공교롭게도 다음날엔 부체찰사 김신국이 올린 장계가 올라왔는데, 이 또한 부산 왜군 진영 화재를 다룬 내용이었다. 군관 정희현 일행이 왜군 진영을 불사른 공로가 있다며 포상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실상을 조사하지도 않은 채 이순신의 장계를 거짓으로 판단해 버렸다.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정희현 일행은 도체찰사 이원익 휘하였고 이들을 배에 태워 왜군 진영으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한 건 이순신 휘하의 거제현령 안위의 일행이었다. 안위 수하의 병졸들은 정희현 등과 동행해 적의 진영을 불살랐다.  

선조 입장에선 한번 ‘거짓’이라고 마음을 먹으면, 그 사실이 틀리더라도 ‘참’으로 인식을 바꾸는 게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 탓인지 ‘뒤끝’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끝까지 가는 스타일인 셈이다. 

여기에 불을 지핀 건 원균이 1597년 1월 22일에 올린 상소문이었다. 시점도 그랬지만, 결단의 방아쇠를 재촉할 만한 문구였다. 「선조실록」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원균의 상소 내용은 이랬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 하여금 적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바다 밖에서 맞서 공격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는 신臣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터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이며,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뢰옵니다.” 이순신 대신 자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이순신을 향한 선조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을 향한 선조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요시라의 반간계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이순신을 징계하기 위해 열렸던 1월 27일의 회의 자리에서 선조는 ‘허위 보고’ 문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순신이 자신을 속였다며 “그가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줄 수 없다”는 극언까지 퍼부었다. 그러자 윤두수가 가세했다. 그는 이날 선조에게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하고 있다”며 “이순신을 체직遞職(벼슬을 갈아 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선조와 이순신은 서로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반면 원균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원균의 후원자들은 일방적으로 원균의 칭찬만 늘어놓으며 선조의 판단력을 흔들어 놓았다. 최고 지도자라면 당연히 사실관계를 면밀히 파악하고 나서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선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하지 아니했다. 

그렇게 선조는 원균의 능력을 오판했고, 적의 반간계에도 속아 넘어가는 치명적인 실수를 낳았다. 결국 선조는 2월 6일 이순신을 파직하고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내심 이순신의 반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순신을 어떻게 잡아오느냐가 문제였다. 그런데 정철과 유홍 두 사람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선조를 안심시켰다. 워낙 충성심이 높은 터라 왕명에 두말없이 잡혀 올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조정은 금부도사 외 10여명의 나졸로 구성된 체포조를 한산도로 내려보냈다. 2월 25일, 한산도에 도착한 금부도사 일행이 “통제사를 체포하러 왔다”고 하자 장졸들과 백성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그 자리에 없었다. 권율의 장령에 따라 가등청정을 잡기 위해 가덕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가덕도 진중으로 배를 타고 온 금부관원으로부터 어명을 전달받고 나서야 자신이 파직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 이순신 휘하 장졸들이 “저 놈들을 다 죽여라, 간신 같은 놈들!”이라며 반발했다. 

장졸들의 폭언에 겁먹은 금부관원들이 이순신에게 다가가서 “대감, 이것 큰일 났소”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우후 이몽구, 거제현령 안위 등 제장을 불러 울분에 찬 군사들을 진정시키라고 명했다. 군사들은 군령을 지켜 잠잠했다. 

한산도로 돌아온 이순신은 제장들을 불러 진중 창고에 쌓아놓은 군량미와 화약·총포 등을 상세히 기록한 서류를 후임자에게 잘 인수인계할 것을 지시하고 26일 압송길에 올랐다.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이를 바라보던 백성들은 국가의 간성이요, 부모처럼 여겨왔던 분이 죄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울분을 터뜨렸다. 금부관원들은 물론 조선 조정을 겨냥한 힐난을 매섭게 퍼부었다. 

“오늘날 상감이 누구 덕에 평안히 앉아서 위엄을 부릴 수 있단 말이오.” “우리 대감을 잡아가시면 이 땅은 조만간에 적왕敵王 수길의 땅이 될 것이오.” “지난번엔 죄가 없는 것을 알고도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전라도 의병장으로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옥사)을 때려죽이더니 이번에는 통제사 영감을 죽이려드네.”

갈수록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순신은 백성들을 타일렀다. “상감께오서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아니 갈 수 없소. 여러분의 정성은 고마우나 이렇게 길을 막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도리어 옳지 못한 일이오.” 그 무렵 조정은 이순신의 후임을 물색하고 있었다. 원균, 이일, 이억기 등이 후보로 거론됐다고 한다. 이산해, 윤두수, 이항복의 무리는 “원균이 가장 용맹한 장수”라며 강력 추천했다. 

왕족에게 대군을 맡기지 않는 조선왕조의 관례가 있긴 했지만, 무엇이 두려웠는지 이억기 장군을 거론하는 인물은 그 자리에 없었다. 결국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돼 가는 도중인 2월 말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출발한 지 8일 만인 3월 4일에 하옥됐다. 선조가 친국에 나서겠다고 하자 서인 대관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좌찬성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왕명을 받아 추관(죄인을 신문하는 관원)으로 정해졌다. 친국이 아니라면 관례대로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정승급이 맡아야 했다. 하지만 류성룡, 김응남, 이원익 등은 이순신과 사사로운 정과 교분이 있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윤근수가 낙점을 받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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