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6편
국호 인정받은 풍신수길
1596년 조선 재침 선언
교섭기 치밀하게 준비해
15만명 넘는 원정군 편성
어이없는 원균 재등용론
원균 재등용 두둔한 선조

1596년 병신년. 왜국은 조선을 재침하겠단 계획을 확정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게 혼쭐이 났던 왜국은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다. 그때 조선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고, 그 배경엔 조선왕 선조의 우매함이 있었다. 나라든 조직이든 정당이든 지도자가 무능하면 배는 산으로 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상태일까.

크든 작든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크든 작든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1596년 9월 초 책봉식을 마친 풍신수길의 왜나라는 외교적으로 국호를 인정받았다. 명·왜 강화조약은 결렬됐지만, 명나라가 ‘왜국 왕 책봉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명나라는 풍신수실의 재침 선언 소식이 알려지자 “왜국이 다시 공격해 올 경우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명나라의 약속에 너무 기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선 조정은 대책다운 대책도 없이 ‘이순신 지우기’란 치명적 악수를 선택해 백성과 나라를 다시 한번 도탄에 빠뜨렸다. 풍신수길이 재침 움직임에 조선의 책봉정사로 왜국에 머물고 있던 황신은 부랴부랴 비밀 보고서를 작성했다. 1596년 9월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11월 조선 조정에 도착했다. 

왜국은 조선을 재공략하기 위해 강화교섭기 4년 동안 치밀한 준비를 했다. 우선 수군의 전력 증강에 역점을 뒀다.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징발령을 내려 병력과 함선 확충에 나섰다.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면서 병력과 함선의 절반가량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기존 함선인 세키부네가 조선의 판옥선에 취약하다는 점을 인식한 왜국은 좀 더 경쟁력 있는 대형 함선인 아타케부네로 대체하는 한편 물량도 대폭 늘려나갔다.  

강력한 조선 수군을 격파할 전술도 적극 모색했다. 자신들의 강점인 등선육박전술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야간을 틈탄 기습작전도 적극 펼치기로 했다. 조선 수군이 도주할 경우엔 해안의 육군과 함께 수륙합동전술로 타격하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강화조약을 논의하는 동안 병력을 철수하지 않고 조선 남해안 곳곳에 소굴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재침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왜국은 조선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없었다. 그래서 병력 충원과 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이렇게 병선 1000여척, 병력 15만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했는데, 그 짜임새는 임진왜란 때보다 훨씬 견고했다. 

조선 재침 계획을 확정한 왜나라는 다양한 전략을 검토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조선 재침 계획을 확정한 왜나라는 다양한 전략을 검토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선봉 제1진: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이 이끄는 병력 1만명.
선봉 제2진: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 7000명,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 1000명, 송포진신松浦鎭信(마쓰라 시게노부) 3000명, 유마청신有馬晴信(아리마 하루노부) 2000명, 大村喜前(오무라 요시아키) 1000명, 오도순현五島純玄(고토 스미하루) 700명 등 총 1만4700명.
제3진: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의 군사 5000명, 모리승신毛利勝信(모리 가쓰노부) 2000명, 도진풍구島津豊久(시마즈 도요히사) 800명, 고교원종高橋元種(다카하시 모토타네) 600명, 추월종장秋月種長(아키즈키 다네나가) 300명, 이동우병伊東祐兵(이토 스케타카) 500명, 상량뢰방相良賴房(사가라 요리후사) 800명, 협판안치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1200명. 
제4진: 과도직무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사 1만2000명.
제5진: 도진의홍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외 1만명.
제6진: 장종아부원친長宗我部元親(조소카베 모토치카)의 병력 3000을 비롯, 등당고호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 2800명, 내도통총來島通總(구루시마 미치후사) 600명, 관야정영菅野正影(스게노 마사카게) 700명, 중천수성中川秀成(나카가와 히데시게) 1500명.
제7진: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하치스카 이에마사) 병력 7000명을 비롯, 생구일정生駒一正(이코마 가즈마사) 2400명, 입화종무立花宗茂(다치바나 무네시게) 5000명, 모리수포毛利秀包(모리 히데카네) 1000명, 천야행장淺野幸長(아사노 요시나가) 3000명, 입화직차立花直次(다치바나 나오쓰구) 1000명.
사령 제8진: 모리수원毛利秀元(모리 히데모토) 휘하 3만명. 
대장 제9진: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1만명. 
총대장 제10진: 원정군 참모총장 흑전효고黑田孝高(구로다 요시타카)와 총대장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고바야카와 히데아키) 휘하의 정예병력 2만명.


당시 16세의 앳된 나이에 총대장을 맡은 소조천수추는 출정을 앞둔 군사회의에서 3가지 방침을 발표했다. “한양 이북으로 진군하지 않도록 할 것. 우선 전라도를 점령할 것. 이순신의 수군을 격멸할 것.” 

결국은 가장 큰 골칫거리인 이순신을 제거하는 게 목표였다. 어린 나이의 소조천수추는 의욕에 불타 있었지만 일본 제장들은 이순신과의 정면 충돌에는 회의적이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전투경험이 많은 각 진의 장수들은 비밀리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부패와 당파싸움으로 물든 틈을 파고드는 반간계를 쓰자는 의견이 나오자 모두 “옳소”를 외치며 동의했다. 

일본군이 이같은 계략을 세우고 있는 동안 조선 조정에서는 어리석고 어이없는 장면들이 속출했다. 1596년 11월 9일, 해평부원군 우찬성 윤근수가 상소를 올렸다. 전임 좌의정 윤두수의 아우인 그는 당시 전라병사로 지내던 원균을 다시 경상우수사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로, 이순신을 전라도 통제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선조는 조정 대신들에게 의견을 내보라고 했다.

류성룡이 나서 “원균은 부하들에게 신망을 잃어 적합하지 않다”며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이순신의 직속상관인 이원익 역시 “이순신의 자리를 옮길 경우 잘못된 일이 생길 것”이라며 류성룡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때 황신의 비밀 보고서가 조선 조정에 도착했다. 조선 수뇌부는 나름의 대응전략을 세웠다. 청야입보淸野立保와 해로차단이었다. 청야입보는 식량과 생필품을 견고한 성내에 들여다 놓고 벌이는 거점방어 전술로 적을 지치게 만든 후 격퇴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해로차단은 말 그대로 바다 위에서 정면 승부를 내자는 것인데, 당시의 조선 수군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전술이었다. 

전쟁준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선조는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이순신과 원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원익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이며, 태만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며 이순신을 평가했다. 반면 원균을 향해선 “전투에서는 제법 쓸   만하지만, 평상시에는 군사를 맡길 수 없는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선조는 “원균은 나랏일에 정성스럽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다시 이원익에게 쓸만 한 장수를 천거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합당한 인물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 쉽게 천거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눈치껏 대답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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