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7
왜 침략 철저하게 준비한 이순신
조정, 요시라를 이중첩자로 판단
소서행장의 거짓 서신까지 전해
요시라의 말 그대로 믿은 김응서
당쟁 유발할 언사 자제한 류성룡

서애 류성룡은 당쟁을 유발할 만한 언사를 자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순신을 두둔할 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혹자는 “류성룡의 침은 종기(당쟁)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다”는 말까지 남겼다. 종기를 없앨 때는 말을 참아 생긴 침을 발랐던 것에 빗댄 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인들은 정쟁 앞에서 말을 조심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총선을 앞둔 여야 정치권의 말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총선을 앞둔 여야 정치권의 말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왜국 수뇌부가 반간계로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자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서행장은 조선 재침공에 앞서 일단 이순신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정탐해봤다. 그 결과, 조선의 삼도 수군의 각 요충지에는 철쇄鐵鎖, 포대砲臺, 망대望臺, 봉수대烽燧臺, 군비병軍備兵 등 어느 하나도 물 샐틈없었다.

군량과 식염, 화약 등도 3~4년 정도 버틸 만큼 비축돼 있었다. 왜국 장수들이 입버릇처럼 떠들던 “명나라는 두려워할 게 없지만, 이순신은 큰 두통거리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건 아니었다.

소서행장은 분통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졌다. “이순신을 파직시키거나 죽이려면 반간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이다.” 소서행장은 조선에서 세작 활동을 해오고 있는 자신의 수하 요시라要時羅에게 실행 명령을 내렸다. 

요시라는 진작부터 조선의 일부 고위 공직자들에게 뇌물을 던져 주거나 왜국의 군사정보를 슬쩍 흘리면서 나름 대접을 받아왔다. 그렇게 ‘항왜자’ 행세를 해온 인물이다. 임진왜란과 명·일 강화교섭 시기에 조선에서는 항복한 왜군 중 조선 편에 서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항왜자로 분류했다. 반대로 왜군에 항복하고 조력자가 된 사람들은 ‘순왜자’로 일컬었다. 

당시 항왜자들을 총관리하던 좌의정 김응남은 요시라와 많은 정보를 주고받은 터라 그를 이용 가치가 있는 이중첩자 정도로 판단했다. 그를 역이용해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권력투쟁으로 몰아넣으면 왜국의 재침을 막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있기도 했다. 요시라는 단지 왜국의 첩자일 뿐이라고 인지한 조선의 인물은 이순신과 황신밖에 없었다.   

요시라는 은밀히 좌의정 김응남을 만나 이렇게 속삭였다. “가등청정이 이끄는 군사들이 대마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언제 부산으로 건너올지 모르니 이순신을 출동시켜 요격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소서행장의 의중이기도 합니다.” 소서행장은 화친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가등청정은 전쟁을 주장하기 때문에 서로 죽일 듯 달려드는 사이라는 소문을 내고, 이를 믿도록 해왔기 때문에 충분히 먹혀들어갈 만한 얘기였다.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도 만났다. 그리고 소서행장의 거짓 서신을 전했다. 서신 내용은 이랬다. “왜국이 다시 출병한 건 주전파인 가등청정의 주장 때문이다. 애당초 강화를 주장하는 우리는 가등청정을 원수로 본다. 그래서 조선 장수의 손을 빌려 가등청정을 죽이려 한다. 조선은 수군 명장 이순신을 보내 가등청정이 나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가등청정이 탄 병선을 가르쳐 줄 테니, 백전백승하는 이순신의 전략 수완으로 가등청정을 베도록 하라. 가등청정이 비록 웅맹하지만 이순신의 상대는 못 된다. 가등청정만 죽으면 전쟁을 주장하는 세력이 몰락해 양국의 강화가 성립될 것이다.”

요시라는 김응서에게 세치 혀를 놀리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가등청정이 대군을 거느리고 1월 7일 나올 예정이니 이순신이 중로에서 쳐 사로잡게 하시오. 그러면 두 나라가 다시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시기 많고, 어리석고, 무식하며, 허영심 많은 김응서는 요시라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뇌물도 받았던 터라 김응서는 이 내용을 도원수 권율에게 전달했다. 권율도 속아 넘어가 그대로 조정에 알렸다.  선조는 권율의 장계를 보고 비변사를 불러들여 사실을 알아보고자 했다. 이때 해평부원군 우찬성 윤근수는 “이순신을 시켜 가등청정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소”라며 권율의 진언대로 이순신을 출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비변사 부제조副提調 황신이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두 사람이 비록 틈이 있다 하나 그놈들이 자신들 나라를 위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오. 이는 서로 짜고 벌이는 계략일 수도 있소. 자고로 기모와 비책이 적장으로부터 나와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황신은 왜국에 오래 있어 봐서 적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아울러 본래부터 명민하고 담략이 뛰어났다. 류성룡이 미관말직이던 그를 천거해 접반사·통신사 등 외교 방면으로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선조는 류성룡을 바라보면서 “황신의 말이 옳은 것 같소”라고 말했다. 그런데 류성룡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떡일 뿐이었다. 자신이 이순신의 출정을 막으면 다음에 일어날 일이 뻔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어버린 것이다. 혹자는 그 침묵을 이렇게 묘사했다. “류 정승의 침은 종기(당쟁)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다.” 종기를 없앨 때는 말을 참아 생긴 침을 발랐던 시절이기에 나온 촌철살인이었다. 

며칠 뒤에 선조는 황신을 삼도수군 위유사慰諭使로 삼아 한산도로 내려 보냈다. 위유사는 왕명을 받아 바닷가에서 고생하는 장졸들의 노역을 위문하는 사절인데, 이는 명목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반간계의 내막을 알아오라는 선조의 은밀한 지시가 있었다.  

이순신은 이미 풍신수길의 처조카인 소조천수추를 총대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선봉으로 삼은 15만 대군이 바다를 건넌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로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수하 장졸들도 이순신과 생사를 함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황신은 이순신과는 첫 대면이었다. 그런데 한산도의 분위기와 이순신의 인성과 자기관리. 통찰력과 열정, 화합과 결속을 위한 소통방식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까지 생겨났다.   

사실 황신은 한양에서 이순신에 관한 여러 소문을 들어왔다.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제승당과 운주각을 짓고 거처로 삼고 있다더라. 100만명의 유민을 끌어들여 삼도의 해왕 노릇도 한다. 조정의 처분을 듣기도 전에 자기 마음대로 논공행상을 한다더라. 전공이 많은 원균을 배척한다.”

류성룡은 당쟁을 피하기 위해 말을 아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류성룡은 당쟁을 피하기 위해 말을 아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황신은 ‘모든 소문이 단지 참언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순신의 거처를 살펴보니 사졸과 다름없는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같은 거짓 정보들의 출처가 과연 어딘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도 원균, 이일, 김응서, 권율, 윤두수·윤근수 형제, 이산해 등의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시기심과 당파 싸움이 영웅을 비틀어 놨구나’라는 판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황신이 이순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등청정을 처치해준다면 수십만 원정군을 데리고 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소서행장의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이순신은 ‘부당不當·불가不可·불연不然’을 진술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의 장면은 1596년 12월 즈음의 일로 추정된다. 이순신은 1595년 3월 자신의 일기장에 ‘적의 재침’을 기정사실화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남해안 일대의 숨은 적을 수색하고 토벌하고, 왜국의 정세도 살펴왔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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