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원고
시인이 그렸던 목가적 풍경과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현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시인(왼쪽부터). 이들을 지칭해 청록파 시인이라 불렀다.[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시인(왼쪽부터). 이들을 지칭해 청록파 시인이라 불렀다.[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12일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시 166편이 공개됐다. 박목월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어머니가 모아놓은 원고를 가지고 있다가 공개한 작품이다. 박목월 시인이 작고한 건 1978년이니 46년 만에 빛을 본 시들이다.

이번 미발표 원고에는 전쟁의 참상, 사회의 아픔 등 그간 보지 못했던 박목월의 시 세계가 있다. 시집이란 비석처럼 자신의 묘지 앞에 세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걸어가던 낭만주의 나그네 박목월은 이제 사라졌다.

일체형 PC 하나를 중고로 판매하기 위해서 하드디스크를 정리했다. 오래된 원고들과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3년 전에 쓴 원고도 있었다. 분명 나에게서 나온 글이었는데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비문이, 생각들이 문장에서 보여 민망했다. 3년 전 나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글로 만난 내가 생경하다가 글을 이리저리 퇴고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누구나 남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이 있다. 굳이 작품이나 글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을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수많은 SNS에 기록하며 살아간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기록을 잔뜩 남기는 시대가 됐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따로 생겨 사후 자신의 기록을 지우거나 정리하고자 하는 이들까지 있음을 생각했을 때 바야흐로 기록의 시대다.

기록이라는 것은 찰나를 박제하는 거다. 사진이 30분의 1초의 속도로 빛을 박제하듯 글 역시 특정 모습을 박제한다. 나에겐 다양한 모습이 있으므로 글을 쓸 때, 그리고 그 글을 퇴고하며 책을 낼 때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남는다. 그래서 스스로의 기록이란 사실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남기고 싶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미공개 원고를 발표한 것을 두고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아버지인 박목월이 “미공개 시들은 발표하기 싫어서, 발표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또는 시집에 어울리지 않아서 빼냈을 수도 있다”며 “그런 아버지 마음을 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박목월 시 생애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사진 |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 제공]
[사진 |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 제공]

그간 청록파로 불린 박목월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참혹한 현실을 ‘술 익는 마을’ 등 서정적 시를 쓰면서 도피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쉽게 말해서 쌀을 수탈당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 났던 시대에 쌀을 빚어 ‘술 익는 냄새’가 나는 마을을 묘사하며 사회적 문제들에 눈을 감지 않았냐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한 미발표 시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담고 있다. 슈샨보오이(구두닦이 소년ㆍshoeshine boy)를 그리는 모습은 그간 박목월의 시에서 볼 수 없었던 거다. 미발표 시 다수가 박목월 시인의 시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을 그린다. 

슈샨보오이
 
6·25때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
슈샨보이.
길모퉁이의 구두를 닦는 슈샨·보이.

곱슬머리가 부룩송아지처럼
귀연 슈샨·보이.

학교길에서 언제나 만나는 슈샨·보이.
나만보면 빙긋웃는 그아이 슈샨·보이.

이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
비가 오는데, 잠자리나 마련 했을가. 슈샨·보이
누구가 학교를 보내주는 분이 없을가. 슈샨·보이
아아 눈이 동그랗게 아름다운 그애 슈샨보이
학교 길에 내일도 만날가 그애 슈샨보이.

내 컴퓨터의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박목월의 시집을 떠올렸다. 「청록집」 「산도화」 「난. 기타」 「첨담」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 그의 수많은 시집은 모두 특유의 서정이 묻어나지만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은 없다. 지금에 와서 보니 이것이 박목월이 원했던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토속적이며 서정적인 삶. 그토록 비판받았던 사회상을 회피했다는 그의 시들은 사실 시인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유토피아였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박목월의 미완성 원고를 생각하다 다시 컴퓨터에 띄워져 있는 내 원고를 봤다. 과거의 원고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수정한 것을 저장하지 않기로 했다. 3년 전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을 그대로 남기기로 했다. 물론 비문은 살짝 고쳤다. 그건 고쳐도 될 것이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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