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에 숨은 한국경제의 ‘맨살’
가성비, 1인가구, 고령화가 견인한 바나나 붐
사과 꺾은 바나나의 애달픈 인기 비결

1980년대 바나나 한송이 가격은 3만원 안팎이었다. 당시 국내선 항공권 운임과 맞먹는 가격 탓에 바나나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 하지만 바나나는 이제 남녀노소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서민 과일’이 됐다. 바나나가 사과보다 더 많이 팔린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가성비, 1인가구, 고령화…. 90g짜리 바나나의 껍질 속엔 한국경제의 불편한 맨살이 숨어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바나나의 달콤씁쓸 경제학을 풀어봤다.

1인가구 증가, 고령화 등의 여파로 바나나 소비가 급증했다.[사진=뉴시스]
1인가구 증가, 고령화 등의 여파로 바나나 소비가 급증했다.[사진=뉴시스]

# 지난 6일 이마트가 선보인 ‘하루하나바나나’가 SNS 상에서 이슈가 됐다. 바나나 한송이를 사면 금세 물러진다는 데 착안한 제품이다. 후숙도(익은 정도)를 달리한 바나나 6개를 순서대로 포장해 6일째 되는 날 가장 덜 익었던 바나나가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한송이를 통째로 사기가 부담되는 1인가구에 적합한 상품인 셈이다. 인스타그램 등 SNS에선 이마트의 아이디어가 “참신하다”는 칭찬의 글이 여럿 올라왔다. 이마트 관계자는 “하루하나바나나는 당일 소진해야 하는 제품으로 주력은 아니지만, 소비자들로부터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 한국야쿠르트는 바나나 한개도 집앞까지 무료로 배송해준다. 이 회사는 지난 9일 야쿠르트 아줌마를 통해 낱개 바나나를 1000원(8월 행사가격)에 배달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야쿠르트 관계자는 “식사 대용으로 간편하게 바나나를 먹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면서 “가격 할인 기간 후에는 낱개당 1200원에 판매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 편의점 GS25에선 1~2개입 소포장 바나나 매출액이 매년 증가세다. 2015년 이후 연 평균 30%대 매출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젊은 여성층이 많이 찾는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도 2009년에 바나나 낱개 판매를 시작했다. 스타벅스커피코리아 관계자는 “당초 음료에 들어가는 바나나를 고객이 직접 고르는 이벤트로 바나나를 도입했지만, 간편한 식사대용으로 바나나를 구입하는 고객이 많아졌다”면서 “지난해 연간 138만개가 판매됐다”고 설명했다. 식품ㆍ유통업계의 바나나 마케팅이 증가한 건 바나나가 국민 과일이 됐다는 방증이다.

한국인이 한해 섭취하는 바나나 양은 평균 3.84㎏(2015년)에 달한다. 수입량도 매년 증가세다. 관세청에 따르면 2000년 18만4000t이던 바나나 수입량은 지난해 43만7000t으로 137.0% 늘었다. 당연히 바나나를 사는 데 지갑을 여는 소비자도 많아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한국인이 2000~2016년 바나나를 구입하는 데 쓴 비용은 연평균 10.6%씩 증가했다. 같은 기간 포도ㆍ참외ㆍ수박 등의 구입 비용이 3.0~8.0% 감소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에 띄는 수치다.

90g짜리 작은 바나나 소비가 훌쩍 늘어난 밑바탕엔 여러 사회 현상이 깔려 있다. 첫째, ‘가성비’ 소비 트렌드다. 1980년대만 해도 바나나는 접하기 힘든 귀한 과일이었다. 2015년 방영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온 가족이 바나나 하나를 잘라 나눠먹던 장면은 픽션이 아니다. 당시 바나나의 낱개 가격은 2000원(이하 종합물가총람), 한송이 가격은 3만원을 호가했다. 국내선 항공권 운임(서울~부산ㆍ2만5900원)보다 바나나 가격이 비쌌던 셈이다. 농산물수입제한 조치로 공급 자체가 적었기 때문이다.

비행기 표값보다 비쌌던 그 시절

바나나가 가성비를 갖추게 된 건 1991년 우루과이 라운드로 수입제한이 풀리면서다. 바나나가 밀려들어오면서 가격이 가파르게 하락했고, 누구나 즐기는 ‘서민 과일’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현재 바나나 가격은 1.2~1.3㎏ 기준 2980~3900원(이마트ㆍ롯데마트 기준)으로 1988년보다 훨씬 저렴하다. 대형마트 과일 판매량 1위로 바나나가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형마트의 한 관계자는 “바나나는 연간 과일 판매량 1위”라면서 “저렴해서 부담 없고 연중 상시 판매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1980년대 농산물수입제한 조치로 바나나 가격은 ‘금값’이었다. 사진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사진=더스쿠프 포토]
1980년대 농산물수입제한 조치로 바나나 가격은 ‘금값’이었다. 사진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사진=더스쿠프 포토]

둘째, 급증한 1인가구가 바나나 소비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1인가구가 식사대용으로 바나나를 찾고 있어서다. 1인가구 직장인 한소영(28)씨는 바쁜 출근길에 바나나로 아침을 대신한다. 그는 “간편하고 포만감이 좋아, 끼니를 때우기 어려울 때 바나나를 먹는다”고 답했다. 지난해 농촌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바나나는 아침 식사대용으로 선호하는 과일 중 2위(19.7%)에 꼽혔다. 계절과도 무관했다. 바로 섭취할 수 있는 소포장 바나나 제품이 날개 돋힌 듯 팔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령화 사회에서 선호도 높아

셋째, 핵가족화가 바나나 소비를 부추겼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과일을 깎아 먹던 시대가 지나가면서 바나나가 인기품목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허정회 농촌경제연구원(과일과채관측팀) 팀장은 “과일 소비 트렌드가 점차 먹기 편한 것으로 변하고 있다”면서 “이는 핵가족화 시기와 맞물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많이 먹던 사과ㆍ배ㆍ단감ㆍ수박의 수요가 감소하고 바로 섭취할 수 있는 딸기ㆍ바나나 등의 선호도가 높아지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이마트에서 바나나 매출액(376억원)이 사상 처음 사과 매출액(331억원)을 추월한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넷째, 고령화 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는 고령화 사회를 먼저 맞은 일본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바나나 수입량은 연간 97만6000t(2016년ㆍ일본농림수산성)으로, 한국의 두배에 이른다. 같은 기간 일본의 연평균 바나나 소비량(2인 이상 가구 기준)은 18㎏에 달했다. 65세 이상 인구가 27.9%(2018년)에 달하는 일본에서는 식감이 부드러운 바나나를 선호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지난해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14.0%)에 진입한 한국에서도 점차 나타나고 있다. 농협하나로마트 관계자는 “바나나는 부드럽고 영양가가 풍부한 데다 가격이 저렴해 노년층의 선호도가 높다”고 말했다. 가성비 트렌드, 1인가구 증가, 고령화 사회의 접점에 있는 바나나. 국내 바나나 시장이 더 커질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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