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속에 뿌려진 글 ❸

거리를 걷다보면 우리는 수많은 안내판과 간판 등을 마주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거리를 걷다보면 우리는 수많은 안내판과 간판 등을 마주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스마트폰에 단어 하나만 입력하면 갖은 정보가 줄줄이 쏟아진다.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도 없고, 굳이 메모를 할 이유도 없다. 이제 외우는 것보다 잘 찾는 게 미덕이 된 시대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골목을 외롭게 만든다. 골목에 붙은 광고나 전단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도, 그 속에서 공존하는 나무와 꽃에 신경 쓰는 이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당연히 거기에 누가 사는지, 누가 오가는지도 관심 밖 일이 돼버렸다. ‘세상의 모든 걸 궁금해하는 어린아이처럼 골목을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보면 어떨까’ ‘그럼 우리네 마을이 좀 더 아름다워지고 살기 좋아지진 않을까’란 의문을 품어본다.

안내판과 간판 등 수많은 문자와 숫자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사진=오상민 작가] 
안내판과 간판 등 수많은 문자와 숫자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사진=오상민 작가] 

#알림판과 암호 = 지자체나 공공기관은 동네 구석구석에 많은 알림판을 달아서 만든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만한 곳에, 혹은 자기 시설에 알림판이나 배너·현수막을 제작해 부착한다. 쓰레기 분리수거, 교통안전, 주차금지, 생활질서 등 내용은 다양하다. 그만큼 주민들에게 알려야 할 일이 많은 모양이다. 일일이 한명씩 붙잡고 알리는 게 불가능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건 알림판·배너·현수막이 붙은 자리엔 예외 없이 숫자와 문자를 섞어 만든 기호가 적혀있다는 점이다. 전봇대·주차장·소화전 등 수십·수백, 어쩌면 수천 개의 시설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곳에서 그 기호는 의미를 확인할 수 없는 암호가 된다. 어떤 아이들은 그 기호를 자랑하듯 외우기도 한다. 

이렇게 길에 뿌려지던 정보는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스마트폰으로도 들어온다. 비상문자가 울리기 시작한 것도 벌써 1년이 넘은 듯하다. 하루에도 몇차례 요란하게 비상문자가 울리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길바닥에 뿌려진 정보처럼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1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비상문자를 받으니 비상非常이 일상日常이 된 듯하다. 그러니 그 비상함을 느끼기도 어려울 수밖에…. 비상문자를 울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스친다. 

거리 보안등에 적힌 관리자 번호가 암호처럼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거리 보안등에 적힌 관리자 번호가 암호처럼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간판 속 글씨 =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나 자신과 내가 하는 일을 알리는 건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는지 알리는 건 생존과 관련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몹시 크게 만든 간판에 하고 싶은 말을 빼곡하게 적어넣곤 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어떤 것이 주된 일이고 부수적인 일인지 헛갈릴 땐 간판을 왜 달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또다른 어떤 사람들은 쇼윈도에 한가득 자신이 하는 일을 글씨나 그림 따위로 적어놓는다. 누구나 아는 천국에 있는 김밥집 쇼윈도엔 이 집이 취급하는 모든 메뉴가 적혀있다. 분명 김밥집 간판인데 김밥보다 찌개·분식·돈가스 메뉴가 더 많다. 그리고 어떨 땐 돈가스 스페셜이 더 맛있기도 하다. 

쇼윈도에 글씨를 빼곡히 적어놓은 또다른 업종은 공인중개사사무소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중개하는 일이다 보니 양쪽의 수요를 모두 충족해주려는 고육책쯤으로 보인다. 파는 사람 입장에선 다른 이들은 어떻게 내놨는지가 궁금하고 사는 사람 입장에선 다양한 물건의 시세를 확인하고 싶을 테니 말이다. 

빼곡히 손으로 적어놓은 부동산 매물판이 쇼윈도를 가득 채웠다. [사진=오상민 작가]
빼곡히 손으로 적어놓은 부동산 매물판이 쇼윈도를 가득 채웠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쨌거나 물건 거래가 완료되면 쇼윈도의 정보가 내려가고, 물건이 들어오면 새 정보가 다시 올라온다. 물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바뀌는 정보를 보고 공인중개사사무소에 들어가고, 그때부터 중개가 본격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수시로 바뀌는 쇼윈도 속 부동산 물건 정보는 움직이는 광고판이나 다름없다. 

부동산 말고도 다양한 업체가 간판·쇼윈도에 글씨나 그림을 넣어 자신을 알린다. 배너·전단지·명함은 기본이다. 때론 바람을 불어넣어 만든 춤추는 사람, 춤추는 돼지, 춤추는 피에로도 광고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코로나19 탓에 요즘은 잘 안 보이지만 1년여 전만 해도 내레이터 모델이 신나는 음악과 함께 호객행위를 하기도 했다. 모든 게 자신과 자신의 가게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나를 알리는 건 중요하다. 생존 문제니까….

얼마나 오래 붙어있었을까. 군데군데 떨어지고 얇아졌지만 ‘쌀’이란 글자를 보여주기엔 부족함이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얼마나 오래 붙어있었을까. 군데군데 떨어지고 얇아졌지만 ‘쌀’이란 글자를 보여주기엔 부족함이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잘 찾으면 그만이지만… = 내가 어렸을 땐 마을의 모든 것을 머리에 저장해 놨던 것 같다. 마을 한구석에 적힌 작은 낙서, 마을 입구에 놓인 작은 돌멩이도 기억의 대상이었다. 사실 외우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TV편성표도 매일 매주 머릿속에 입력해 놓고 있었으니, 그때 그 시절엔 ‘외우기’가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상은 언젠가부터 달라졌다. 외우는 것보단 잘 찾는 법을 아는 게 미덕이 됐다. 온라인에서 검색하면 모든 정보가 줄줄 나오는 탓에 뭔가를 굳이 외우거나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알 필요가 있는 게 아니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요즘 세태를 조금은 불편하게 생각하는 나도 그렇다. 몇년 전만 해도 잘 읽던 뉴스 기사를 조금씩 멀리한다. 나와는 동떨어진 남 이야기에 관심이 사라져간다. 그러다 보니 마을의 하찮은 낙서나 작은 돌멩이에 관심이 갈 리 없다. 

도로명주소로 개편되면서 도로명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는 건 어렵지 않게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도로명주소로 개편되면서 도로명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는 건 어렵지 않게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린아이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는 길이라도 특별함을 찾을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게다.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마을을 궁금해하듯 세상을 좀 더 애정 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다면 마을은 더 아름다워지고 더 살기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골목 속에 남은 낙서, 낡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깊어진다. 어쩌면 골목의 애달픈 단상일지 모르겠다.  

글 = 박용준 보통사람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opa.lab.02064@gmail.com 

사진 =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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