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투자 늘리는 글로벌 파운드리
파운드리 협력 절실한 국내 팹리스
팹리스 육성하려면 인프라 개선해야

반도체 공급난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반도체(시스템) 수요가 흘러 넘친다는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팹리스 업계엔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글로벌 대형 팹리스들의 주문에 이미 과부하가 걸린 파운드리 업체들이 국내 중소형 팹리스들의 주문을 좀처럼 소화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파운드리 부족 현상이 심해지면서 국내 중소형 팹리스들이 반도체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파운드리 부족 현상이 심해지면서 국내 중소형 팹리스들이 반도체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해 불거진 반도체 쇼티지(공급부족ㆍShortage) 이슈는 현재진행형이다. 완성차 업계에서 시작된 반도체 공급난은 이제 스마트폰, 가전, 통신 분야까지 번졌다. 반도체가 부족한 탓에 생산 계획을 조정하거나 하다못해 반도체가 필요한 부품을 빼버린 채 제품을 판매하는 곳도 적지 않다. 최근 테슬라가 USB포트를 장착하지 않은 차량을 인도한 건 단적인 예다.

심지어 내년엔 반도체 주재료인 웨이퍼(Wafer)마저 품귀 현상을 빚을 거란 전망이 쏟아진다. 반도체 대란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들이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각각 2500억 달러(약 295조원), 5000억엔(약 5조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밝혔고, 유럽연합(EU)은 반도체 육성을 위한 ‘유럽 반도체 법’을 마련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들 국가의 반도체 공급망 강화 전략의 핵심엔 ‘반도체 기업 모시기’가 있다. 파격적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이미 내로라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투자를 약속했다. 일례로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ㆍFoundry) 기업 TSMC는 소니와 손을 잡고 일본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 내년 착공해 2024년 양산을 시작할 예정인데, 투자비용의 절반가량을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 파운드리 시장에 다시 출사표를 던진 인텔은 미국ㆍ유럽 투자 계획을 세웠다. 

파운드리 1위 자리를 노리는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지난 14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70억 달러 규모의 미국 파운드리 공장 투자 계획을 매듭지었다. 삼성전자의 제2 파운드리 공장이 들어설 텍사스주 테일러시의 부지는 오스틴시에 있는 제1공장보다 4배가량 크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2024년 하반기 가동을 시작할 계획이다. 미국엔 세계 시장을 거머쥐고 있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업체ㆍFabless)들이 포진해 있는 만큼 삼성전자로선 고객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국내 팹리스 업계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파운드리 업계가 넘치는 수요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반면, 국내 팹리스 업계에선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파운드리 업체에 반도체 생산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는 건 그만큼 팹리스 업계 분위기도 좋다는 뜻인데, 이유가 뭘까.
 
먼저 국내 팹리스 생태계부터 살펴보자. 국내 팹리스 업계는 메모리나 파운드리에 비하면 규모가 미미한 수준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1.5%에 불과하다. 그만큼 개별 기업들의 몸집도 크지 않다. 지난해 기준 매출 1조원을 넘긴 곳은 LX세미콘이 유일하고, 그 외 5곳이 1000억원을 갓 넘겼다. 

이런 팹리스 업계의 빠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선 파운드리와의 협력 인프라가 중요하다. 설계자산(IP)ㆍ설계툴 공유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연구ㆍ개발(R&D), 시제품 생산에 필요한 MPW(멀티 프로젝트 웨이퍼)도 손쉽게 지원받을 수 있어서다. 지난 2019년 4월 정부가 팹리스 시장점유율을 1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팹리스-파운드리 간 상생협력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참고: MPW는 여러 팹리스의 반도체 칩을 한번에 만들 수 있는 웨이퍼를 말한다. R&D나 테스트용 시제품을 만드는 데 쓰인다.]

하지만 최근 반도체 수요가 파운드리의 생산능력을 넘어서자, 국내 팹리스는 뒷전으로 밀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파운드리 업체로선 물량이 많은 글로벌 팹리스의 주문을 받는 게 수익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국내 팹리스 업체 관계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미 수요가 생산능력을 넘어설 만큼 많다보니 파운드리 업체들이 신규 제품이나 물량이 적은 주문을 받지 않고 있다. 당연히 주문량이 많은 대기업이나 글로벌 기업들이 우선이다. 그나마 발주를 넣는다고 해도 공급량이 기존의 80% 이하로 줄어든 데다, 언제 받을 수 있을지도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다. 파운드리 업체들이 넘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MPW 공급량도 부쩍 줄였기 때문이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시장성이나 수익성이 높다고 전망되는 사업일지라도 수급 일정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 원가가 얼마나 인상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가 난감하다”면서 “요즘 생산수량도 줄고, 한계에 닥치다 보니 인치를 바꿔보는 등 다각도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테스트를 할 수 없다보니 그마저도 힘든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우려스러운 건 세계 각국의 반도체 공급망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해외 투자가 확대될수록 국내 팹리스 생태계가 더 열악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 일본 등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건 자국의 산업 경쟁력 강화가 최우선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해외에 투자한 공장이 국내 팹리스 업체들을 위해 가동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얘기다. 

이종환 상명대(시스템반도체공학) 교수는 “미국 내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제품들은 우선적으로 미국 수요를 커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공급되는 건 후순위로 밀릴 공산이 크다”면서 “그러기 위해서 미국이 (파운드리 기업에)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쇼티지 이슈가 세계를 흔들고 있다. 반도체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공급망 확보 경쟁도 치열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반도체 공급망은 안전할까. 파운드리가 빛날수록 팹리스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공급망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때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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