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 직장 내 괴롭힘 실태

“8시 전에 출근해서 과장님 책상 정리하고 물이며 커피 따라 둬라.” 대전시청의 20대 공무원이 선배 공무원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업무 지시다. 그가 지시를 따르길 거부하자 괴롭힘이 시작됐다. 팀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던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철밥통’이라 불릴 만큼 고용 안정성이 탄탄한 공공부문에 취업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철밥통 밑에 만연한 ‘직장 내 갑질’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공공부문에서 발생하는 직장 내 괴롭힘·갑질 사건은 신고조차 어렵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9월, 대전시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5일엔 대전소방본부의 40대 소방 공무원이, 26일엔 대전시청에서 1년도 채 근무하지 않은 20대 공무원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 직장 내 갑질과 괴롭힘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다. 

특히 20대 공무원의 죽음을 두고 전국이 들썩이자 허태정 대전시장은 “다양한 세대 구성원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신입 공무원 8명을 불러 오찬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참고: 이 사건을 두고 대전시 감사위원회는 조사에 착수한 지 한달 만에 “조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사건을 경찰에 의뢰했다. 대전시는 부랴부랴 불합리한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조직문화 혁신기획단’을 꾸리고 나섰다.]  

지자체별 직장 내 괴롭힘·갑질 문제는 대체 어떤 상황인 걸까. 이은주 정의당 의원과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가 전국 17개 광역지자체에 2020년 1월~2021년 4월 ‘직장 내 괴롭힘 신고건수’를 물어본 결과, 비극이 연이어 터진 대전시는 고작 1건이라고 답했다. 

이는 실제 발생하는 사건에 비해 신고건수가 턱없이 적다는 걸 의미한다. 이 조사에서 17개 광역지자체에 신고된 직장 내 괴롭힘·갑질 사건은 총 123건이었다. 이중 서울시(59건)의 비중이 컸고, 나머지 지자체는 10건 안팎에 그쳤다.

[※참고: 2020년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괴롭힘·갑질 신고건수는 5823건으로, 월평균 485건에 달했다. 직장 내 괴롭힘·갑질 피해자를 돕는 직장갑질119가 2020년 이메일로 받은 제보만 해도 3630건이었다. 민간기업 직장인의 신고를 포함한 수치임을 감안해도 각 지자체에 신고된 직장 내 갑질 신고건수는 이상할 만큼 적은 숫자임에 분명하다.] 

 

지자체뿐만 아니라 공공기관까지 확대해도 직장 내 괴롭힘·갑질 문제는 심각하다. 2021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례를 집계한 결과, 신원이 확인된 18명 중 무려 절반인 9명이 공공부문(공무원·공공기관 포함)에서 근무하는 이들이었다(1월~11월 27일 기준). 이들의 근무지는 경찰·미술관·교육청 등으로, 연령대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턱없이 적은 신고건수와 달리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고통에 시달린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실태를 반영한 지표는 다른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과 직장갑질119가 실시한 조사에서 지난 1년간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있는 직장인 중 공공부문 직장인의 32.6%가 ‘진료나 상담이 필요했지만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전체 피해 직장인 평균(29.8%)보다 2.8%포인트나 높은 수치였다. 이들에게 괴롭힘 대응 방법을 물었을 때도 76.7%가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해 전체 평균(72.7%)을 웃돌았다. 

현실서 적용 안 되는 법

그렇다면 ‘철밥통’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공부문에서 직장 내 괴롭힘·갑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그럴듯한’ 지침이 있음에도 현실에서 제대로 작용하지 않아서다. 정부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2019년 7월)을 시행하기 전인 2018년 7월 ‘공공분야 갑질 근절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청사진의 골자는 공공분야에서 모범을 보이면 민간분야까지도 확대하겠다는 거였다. 

 


대책에는 공공기관의 직장 내 괴롭힘과 갑질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사전예방, 피해자 보호·지원 등 단계별 방안을 담았다. 2019년 2월에는 각 행정기관과 지자체에 적용할 가이드라인도 마련했다. 

그러나 현실은 발 빠른 법과는 달랐다. 지난 7월 기준 종합대책에 따라 갑질 근절 관련 조례를 제정한 곳은 17개 광역지자체 중 9개에 그쳤다. 여기에 시행 방안인 규칙이나 매뉴얼까지 마련한 곳은 불과 5개(서울·울산·경기·전북·경남)였다. 피해 신고센터 설치 현황은 더욱 심각하다. 17개 지자체 중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신고센터를 갖춘 곳은 단 1개(경남)뿐이었고, 대부분 기존 부서에 사무를 추가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오진호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장은 “(실태를 개선하려면) 일단 피해자가 마음 놓고 신고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종합대책이 있어도 신고센터조차 운영하지 않으니 신고할 길이 없다.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공무원은 센터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노동부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설령 신고를 하더라도 경직된 조직문화 탓에 피해자 보호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피해자 제보 사례를 살펴보면 실제로 2차 가해에 시달리는 이들이 숱하다. 참다못해 신고해도 담당 주무관이 ‘귀찮다’며 해결을 미루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가해자를 향한 법적 제재를 강화하고 나섰다. 행정안전부는 12월 15일까지 ‘지방공무원 징계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우월적 지위 등을 이용한 비인격적 부당행위(제5조제2항제15호)’에 관한 조항을 신설해 직장 갑질 가해자의 징계 수위를 파면·해임(비위 정도가 심하고 고의가 있는 경우)까지 가능하도록 높인 게 핵심 내용이다. 

4년 전 대책 세웠지만…

지난 11월 9일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대전시청 20대 공무원 사건을 직접 언급하며 “제도 개선을 모색하라”고 지시한 이후에 생긴 조치였다. 이를 두고 현장 반응은 싸늘하다. 서울시공무원노조는 “공무원 단체의 요구에는 뒷짐지던 행안부가 대통령의 지시에 즉시 나섰다”며 “통치권자의 지시가 있어야 움직이는 정부 행태도 개선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번지르르’한 법만 만들 게 아니라 현장에서 이를 시행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오 집행위원장은 “직장 내 괴롭힘 대응 방법과 처리결과 등을 점수로 매겨 기관 평가에 반영하거나, 미흡한 대응이 발견되면 상급기관에서 특별감사를 실시하는 등 엄격한 감독이 필요하다”며 “의미 있는 법이 생기는 건 환영하지만, 지금으로선 정부가 법만 만들고 방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든든한 ‘철밥통’이 ‘지옥’이 되지 않으려면 정부의 실질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심지영 더스쿠프 기자
jeeyeong.shi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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