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❸
여야 정치권의 과한 말과 주장
온라인 속 저주에 가까운 폭언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 아쉬워

대통령의 ‘이 **’ 욕설 논란이 끝내 현 정부가 소통 창구라고 자찬했던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중단하는 빌미로 작용했다. 말 한마디로 나라가 흔들리는 것도 촌극이지만, 그 말 한마디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정치권도 우스꽝스럽다. 여기 단어 하나를 다르게 해석해 주목받은 소년이 있다. 높으신 양반들이 이 소년의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여야 정치권의 입씨름이 불편하기만 하다. [사진=뉴시스]
여야 정치권의 입씨름이 불편하기만 하다. [사진=뉴시스]

아직 어리지만 풍채와 용모에서 진작부터 남다른 기상이 넘쳤던 순신. 어느날 한 아이에게 「통감삼권」이라는 책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나라 여후呂后가 척부인戚夫人의 팔다리를 끊은 뒤에 뒷간에 집어넣고 ‘사람돼지’라며 놀리고 비웃었다. 그러자 여후의 아들 혜제惠帝가 어머니에게 간하기를 ‘차비인소위此非人所爲’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순신은 ‘차비인소위’의 의미를 남다르게 해석했다. 지금까지 글을 가르쳐온 모든 사람은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라고 설명했지만 어린 순신은 “이는 사람에게 할 바가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때마침 길을 가던 영의정 동고東皐 이준경의 귀에 이 소리가 들어왔다. 자신도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고 배웠지만, 막상 순신의 새로운 해석을 들으니 ‘헉’ 하며 숨을 꿀꺽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맞아, 맞아, 생각해보니 정말 맞다. 만일 ‘사람이 할 바 아니다’라면 혜제는 어머니께 ‘사람이 아니다’라며 끔찍한 불경불효不敬不孝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영의정은 ‘이런 통찰력을 지닌 이가 누구일까’ 궁금해 가마에서 내려 교습소로 들어가 봤다. 그의 눈엔 14~15세가 될락 말락 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를 가르치던 순신은 이준경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준경이 순신을 바라보니 범의 머리에 제비턱虎頭燕(무인으로 귀하게 될 상)이다. 제비턱만 하더라도 요즘의 관상가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초기 기업인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라고 한다. 삼성의 이병철, 현대의 정주영이 대표적이다.

영의정이 보니 ‘제후의 관상’

하지만 순신은 장래에 만리의 봉토를 다스릴 제후의 상이었다. 국사무쌍(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인재)가 될 관상이니, 아무리 영의정이라 해도 깍듯한 예우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신은 19세쯤에 이미 학문을 많이 이뤘지만, 공부를 더해 ‘깊은 통찰’을 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홍연해, 선거이 등 동무들과 함께 글공부를 위해 강원도 금강산으로 향했다. 몇달을 머물던 그는 머리도 식힐 겸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천봉만학千峯萬壑의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발아래 바위구멍에서 불쑥 나타난 큰 곰 한 마리가 일행을 향해 맹렬히 덤벼드는 게 아닌가. 동무들이 혼비백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순신이 나섰다.

하지만 창도 없고 검도 없는 처지라 맨손으로 곰과 격투를 벌이는 살풍경이 벌어졌다. 순신의 용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지 곰은 그만 달아났다. 순신은 그 곰을 쫓아 험한 언덕과 절벽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곰의 꼬리를 붙잡으려 했다. 제아무리 비호 같은 순신이라도 화살같이 도망치는 곰을 잡기는 어려웠을 터.

이미 깊은 산중이고 곰은 간데없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신선처럼 보이는 한 노인이 바위 위에 혼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 앞에 나아가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노인은 몸을 일으켜 답례하고 난 후 책 한 권을 건네며 말을 꺼냈다. “아까 곰을 시켜 그대를 찾아오게 한 것은 그대가 하괴성의 정기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니, 문文을 놓고 무武를 배워 위태로운 조선의 사직을 붙들어 중흥하게 함이라….” 하괴성은 북두칠성의 두번째 별인 ‘선’을 말한다.

순신이 두 손으로 받아보니 한번도 보지 못하던 병서兵書다. 순신이 두 번 절하고 그 노인의 존호를 물었다. 노인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중국 진秦나라 노생(진시황에게 불로장생을 건의한 도사)이다. 조선의 도인 영랑, 술랑(남랑, 안상과 더불어 신라 효소왕 때 화랑 출신의 신선)이라 하는 친우와 수년간 이 산중에 은거하노라.” 

순신은 마음이 그윽해 꿈속인가, 생시인가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바위 위에서 꾼 꿈일 수도, 숙소에서 꾼 꿈일 수도 있다. 순신은 이를 계기로 붓대를 놓는 대신 무예를 선택하기로 했다. 
 

「무경칠서(중국의 일곱가지 병서)」와 「사전자집(인물의 전기)」을 열심히 파고들었다. 활 쏘고, 말 달리고. 여기에 창검 쓰는 법도 혼신으로 연마해 마침내 ‘십팔기’라는 기술을 체득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20세 전후로 순신의 가족들은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는 순신의 혼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여러 서적을 들여다보면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처가살이 풍습이 꽤 남아 있었기에 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처가 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대강 기록하고 있다.

이주 시기도 불명확하다. 하지만 이순신이 21세에 같은 아산에 살고 있는 전前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영민한 딸 방씨와 혼인식을 치렀다는 기록은 모두 일치한다.  평생 이순신 연구에 매진해온 회당 김기현 선생(1876~1948년)이 저술한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는 이 대목의 스토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인 출신 방진은 내심 당대의 영웅을 아끼는 무남독녀의 배우자로 삼고 싶었다. 자신이 죽고 난 후 집안의 제사도 사위에게 맡기고자 하는 심정이었다. 눈치 빠른 주변 사람들은 방진에게 양자를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기도 했다. 손사래를 치며 방진은 사람 많은 서울로 올라갔다. 여러 서당을 탐방하며 사윗감을 수소문하다 마침내 자신과 사제지분이 두터운 이준경을 찾아갔다. 

방진의 사정을 듣고 난 이준경은 자신이 눈여겨봤던 순신의 얘기를 꺼내 들었다. “풍채가 비범해 장래에 이름을 천하에 떨칠 것이요, 심성과 효도는 그 깊이가 더할 나위 없어 보이는구려.” 방진에게 요즘 말로 ‘강추’를 한 셈이다. 

조선 전기 대사헌을 지냈고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성리학 대가의 천거에 방진은 순신을 찾아가 만남을 가졌다. 순신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였다. 듣던 대로 신장이 팔척이요, 범의 머리와 제비의 턱이며, 잔나비 팔과 곰의 허리였다.

힘쓰기는 분육(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맹분과 위나라의 하육을 함께 부르는 말)의 짝이며, 활쏘기는 양숙(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명궁 양유기)과 견줘 손색이 없다. 방진이 크게 기뻐하여 순신의 아버지를 찾아가 사돈지간을 맺기로 약속했다. 

여야는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두고도 갈등을 빚고 있다. [사진=뉴시스]
여야는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두고도 갈등을 빚고 있다. [사진=뉴시스]

오늘날 정치권에서 나오는 말을 들을 땐 거북할 때가 많다. 대통령의 욕설 파문도 그렇지만, 여야 정치인들의 과한 폭로와 맞대응, 온라인에서 펼쳐지는 증오에 가까운 주장 등을 보고 있자면 왜 이렇게까지 됐나 싶다.

이순신은 무인으로 추앙받았지만, 어릴 때부터 글과 말을 엄중히 다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치인들은 때만 되면 ‘이순신 리더십’을 언급한다. 필자는 그들이 이순신에게 배워야 할 첫번째 덕목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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