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❻
야전 지휘관 능력 십분 발휘
여야 정치권은 정쟁만 일삼아

정치는 협상의 장이다. 여야가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나랏일을 처리하는 게 바로 정치다. 그래서 정치인은 똑똑해야 한다. 때론 전략적으로 거래를 할 줄 알아야 하며, 때론 비수를 꽂을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여야는 둔해 보인다. 전략이 없으니 협치가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맡겨도 되는 걸까.

여야 정치권은 아무런 전략도 없이 다투기만 하는 듯하다. 사진은 이태원 국정조사특위 활동 모습.[사진=뉴시스]
여야 정치권은 아무런 전략도 없이 다투기만 하는 듯하다. 사진은 이태원 국정조사특위 활동 모습.[사진=뉴시스]

이순신이 차고 다니던 화살통은 그의 활솜씨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다. 용과 봉이 조각된 것으로 그에겐 보물과 다름없었다. 골동품을 좋아했던 당시 우의정 유전柳塡은 활터에서 우연히 순신의 활 쏘는 모습을 구경하는데, 그 화살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의 전통을 내가 빌리려 하노니 그대는 허락하겠는가.” 

순신이 대답했다. “일개 화살통인데 뭐가 어렵겠습니까. 다만 저와 대감이 이를 주고받았다는 입소문이 퍼질까 두려울 뿐입니다. 반드시 공정하지 않은 부정행위라 할 것이니, 일개 전통에 연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전이 그 말을 듣고 무안했던지 “그대의 말이 맞다”며 그냥 돌아갔다. 순신의 이런 ‘바른 사나이 정신’은 안타깝게도 ‘괘씸죄’로 차곡히 쌓여만 갔다.

1583년 7월. 한때 순신을 미워했던 이용이 함경도 남병사로 승진해 발령지로 가면서 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데려갔다. 이 무렵, 지금의 길림성과 연해주 지방에 번호藩胡라는 여진족이 있었다. 유목과 침략이 본업이고, 농업이 부업이었다. 니탕개尼蕩介, 울지내鬱只乃, 율보리栗甫里 등 세명의 추장이 이끄는 부락이 가장 강했다. 

이들은 당시 조선과 중국의 우환거리였다. 이들이 함께 침범하면 마을을 분탕질하고 부녀와 재물을 약탈했기 때문에 북방 백성들은 편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당시 함경북병사 김우서金禹瑞, 온성부사 신립申砬, 경원부사 김수金燧, 부령부사 김의현金義賢 등은 명장이라고 평가받는 인물들이었다. 적의 침략을 따라 동서로 대응하면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지만 끝내 섬멸하지는 못했다.

신립이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여전히 불을 끄지 못하자 조정은 순신을 건원보(함경북도 경원군 동원면 신건동)의 권관으로 임명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방 건원보에서 근무하고 싶어 하는 장수는 없었다. 적들이 들어오는 길목에 있고, 군사도 수백명에 불과한 소규모 진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원해주는 사람 없는 순신에게 그나마 벼슬이 떨어진 것이었다. 

건원보에 도착한 순신은 부하 장병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추장 울지내가 제일 강력하고 포악한데, 만일 수천 병마를 거느리고 공격해 온다면 역부족이 될 것이오. 인근 지역의 지원병력이 늦어지면 우리는 고립돼 패배할 것이오. 그러니 비책을 세워 강적을 격파함이 마땅할 것이오.” 

회의를 마친 후 순신은 영리하고 재간 있는 진무(조선시대 병영·수영·진영에 소속된 서리) 한 사람을 불러 여차여차 계책을 설명해주고 적진으로 보냈다.

적의 추장 울지내는 가을을 맞아 두만강을 건너 건원보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조선 쪽에서 강을 건너온 상인 한명이 포로로 잡혀왔다. 울지내는 그냥 그 상인을 베어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상인은 목숨을 구걸하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소인은 건원보에 사는데, 최근 권관 이순신이 새로 도임했습니다. 함께 온 첩이 있는데, 요동과 몽고 방면에서 나오는 보물 노리개를 좋아해 널리 구하는 중이옵니다. 소인은 보물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드나드는 처지입니다. 몸에 지녔던 자본금은 바쳤사오니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건원보를 삼킬 생각이던 울지내는 귀가 솔깃했다. 상인에게 순신의 신분과 첩의 자색, 그리고 재화가 얼마나 있는지 상세하게 물었다. 상인은 “장군의 칼이 소인의 머리를 겨누는 이 판에 어찌 거짓말을 하오리까”라며 울상을 지었다. “이놈! 장군이라니!” 울지내가 호통을 쳤다. 상인은 “예 대왕님!”이라고 고쳐 말하자 “대왕이라 부르지 말고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내 존호를 불러라!” 울지내는 큰 목소리로 또 한번 호통을 쳤다.

그러자 상인은 천연덕스럽게 벌벌 떠는 목소리를 내며 가짜 고자질을 했다. “이순신은 본래 서울의 큰 장사꾼의 자제로, 아니 서울 갑부의 아들로, 아니 갑부의 외동아들로, 돈을 물 쓰듯 하는 인물입니다. 보검이며 조궁(무늬를 조각해 넣은 활)이며 그밖에도 천고의 유물 골동骨董이 전후좌우에 널렸다 합니다. 또 그 애첩은 얼마나 아리따운지 건원보 사람들은 ‘바로 삼켜도 목구멍에도 걸리지 않고 넘어갈 듯하다’며 침을 흘릴 지경입니다.” 이 말을 듣고는 울지내는 입맛을 다시며 미칠 듯 좋아했다.

드디어 울지내는 부하 5000명을 거느리고 순신이 있는 건원보로 향했다. 그날 황혼에 함매(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군사의 입에 막대 등을 물리는 것)하고 강을 건넜다. 잠입 작전은 울지내의 계략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건원보를 치러 가면 인근의 조선 북병사가 지원병을 보낼 것이니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에 기습작전으로 순신을 사로잡고 제 욕심을 채우자고 생각한 것이다. 울지내는 정예병을 지휘하며 오경(새벽 3~5시)에 건원보와 가까운 산골 협로狹路에 도달했다. 굵은 나무토막과 암석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말이 통과하기 어려웠다. 길을 안내하던 상인 포로를 불러 이유를 물었다. 상인은 이렇게 답했다. “필시 이순신이 대왕의 병마가 쳐들어올까 두려워서 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울지내는 운수가 다 됐기 때문인지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다. 굵은 나무토막과 암석을 넘어 행진을 계속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대포 소리가 나더니 사방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지내의 군사들은 흩어져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500 인마人馬가 화살과 돌에 맞아 바로 ‘염라국 귀문관’으로 행차했다. 울지내는 뒤늦게 유적계誘敵計에 빠진 줄 깨달았다. 전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부하의 군복으로 바꿔 입고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문득 한 사람이 7척 장검을 비스듬히 들고 준마를 몰아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 순신이었다. “이놈 울지내야! 네 죄악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하늘의 벌을 피할쏘냐? 내 오늘 밤 너를 잡아 우리 창생의 도탄지고塗炭之苦를 풀고자 한다”고 호령하며 울지내를 생포했다. 다음날 울지내는 북병사 김우서에게 끌려가 바로 처형당했다. 이후로 니탕개, 율보리의 무리가 감히 건원보를 넘보지 못했다.

여야 정치권이 쉼 없이 다투고 있다. 예산안은 법정 기한을 훌쩍 넘겨 처리했지만, 이젠 이태원 국정조사 기간 연장을 두고 다투고 있다. 양쪽이 서로의 주장만 하니 타협이 가능할 리 없다. 그렇다고 양쪽에게 ‘상대방을 설득할 만한 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협치가 하기 싫은 건지, 싸우는 걸 즐기는 건지, 지금 여야는 둔하기 짝이 없다. 왜 정치판엔 이순신 같은 장수가 없을까.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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