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❼
집권당은 민심 아닌 권력자 마음 좇아
측근 의존한 권력자 말로 늘 좋지 않아

집권당의 대표는 누가 될까. 당심을 넘어 민심이 반영될까. 답은 ‘글쎄’로 수렴한다. 집권당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이들이 당심이나 민심이 아닌 권력자의 마음을 좇고 있다는 의문이 곳곳에서 제기돼서다. 더 큰 문제는 측근이란 사람들이 권력자가 진짜 민심을  읽을 수 있도록 돕고 있느냐다. 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7편을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과 현 정치권의 상황을 살펴봤다. 

집권자의 앞날과 측근들의 행보는 연관성이 깊다.[사진=연합뉴스]
집권자의 앞날과 측근들의 행보는 연관성이 깊다.[사진=연합뉴스]

북병사 김우서는 일개 진영鎭營의 변방 장수인 이순신이 여진족 울지내를 생포한 공을 세운 것을 시기했다. 조정에 이런 내용의 장계狀啓를 올렸다. 

“이순신이 낮은 계급의 권관으로 사령관에게 보고해 상의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독단적으로 병사를 움직여 변경에 중대사건을 단행했습니다. 만일 실패했으면 그 책임은 주장에게 돌아갈 것이니 실로 위험한 인물입니다. 비록 공이 있으나 상은 행하기 어렵습니다.” 소진小鎭의 병력으로 빛나는 계략을 꾸며 울지내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던 조정은 포상계획을 접었다. 

1583년 순신의 나이 39세에 조정에서는 가을 끝 무렵인 11월에야 훈련원 참군이란 직함으로 승진을 시켜줬다. 순신의 명성이 비록 날로 높아가나 권세가에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또 조정에서 뒤를 밀어 주는 이가 없으니 벼슬길에 나선 지 1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하급관료에 머물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의기는 태연자약했다.

1583년 11월 15일에 순신의 부친 이정이 아산 향제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순신의 몸은 건원보에 있었다. 어느 날 꿈의 징조가 좋지 않아 부친의 신상을 근심하긴 했지만, 변방의 찬바람과 큰 눈에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듬해가 돼서야 흉보를 듣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2000리 먼 길 아산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이 소식을 들은 당시 함경도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은 자신의 군관을 보내 “성복(상복을 입는 것)을 서서히 행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너무 급하게 달려가지 말라는 얘기였다. 순신은 정언신의 배려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자식이 되어 부모의 흉보를 듣고 어찌 시각을 지체하겠습니까”라며 말을 밤낮으로 달려 끝내 성복했다. 


순신의 3년상이 끝난 1586년 3월, 조정은 42세가 된 순신에게 사복시(수레와 말ㆍ마구ㆍ목축일을 담당하던 기관)에서 문서와 장부를 관리하는 주부(종6품 문관)로 임명했다. 다시 겨우 16일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함북 경흥군 내 국경지역) 병마만호의 자리를 맡겼다. 여진족 토벌과 울지내 생포의 공을 뒤늦게 인정받아 승진한 것이다.

5개월 뒤 순신은 함경감사 정언신의 천거로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함경북도 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 현재는 육지와 연결됐고, 러시아 영토임)의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됐다. 녹둔도는 추운 지역이었으나 벼농사가 가능할 정도로 비옥한 땅이어서 함경도 장병들의 군량미 조달을 담당하고 있었다.

순신은 한편으론 조산보를 지켜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둔전(군사들이 자신들의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는 토지)을 책임져야 했다. 경원慶源부사 이경록李慶祿이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순신과 같이 곡식을 수확하는 한편 호적의 침입도 방어했다. 그런데 녹둔도는 호지胡地로 쑥 들어간 돌각지대였고, 고립된 섬이었다. 수비하는 군사가 적어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래서 순신은 자신의 장수 가운데 이영남李英男을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보내 군사를 늘려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하지만 무슨 심보인지 이일은 끝내 들어주질 않았다. 대책으로 녹둔도 중앙에 목책木柵을 둘러 경계를 세우고 농사를 짓는 백성들도 지켰다. 

8월 중순이 되자 여진족 추장 미니응개彌尼應介 등이 녹둔도의 양곡을 약탈하기 위해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병력으로 쳐들어왔다. 수확철이라 목책 안이 비었음을 탐지한 이들은 내습해 약탈을 시작했다. 이를 막으려 했던 장수 오형吳亨과 임경번林景藩이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미니응개는 두 장수의 죽음을 기회삼아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돌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하지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 전투에서 여진족은 아군 10여명을 죽이고 농민 160여명과 말 15필을 빼앗아 달아났다. 순신은 목책문을 크게 열고 이운룡 등 제장과 더불어 7척 장검을 휘두르며 적을 추격해 아군의 포로 60여명을 탈환하고, 적을 수없이 베었다. 이때 순신도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았다. 전투 중에 군심이 흔들릴까 염려해 남모르게 화살을 빼버리고 표정관리를 했다.

같이 전투에 참여했던 이운룡은 영남 청도淸道 사람으로 약관에 붓을 던지고 무술에 정진하며 일찍 무과에 급제한 바 있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순신의 지략과 용력에 감복해 부하가 되기를 자원하고 서로 충의를 다졌다. 

순신이 적을 추격해 베던 곳을 후세 사람들이 전승대戰勝臺라고 명명하고 비석을 새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북병사 이일은 ‘녹둔도에서 아군의 사상이 10여명, 포로 된 자가 90여명, 탈환된 사람이 60여명, 오랑캐 사망자는 미니응개 등 50여명, 부상자 수백명’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경기침체가 깊어지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정쟁에 매몰될 때가 아니다. [사진=뉴시스]
경기침체가 깊어지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정쟁에 매몰될 때가 아니다. [사진=뉴시스]

그런데도 그 스스로가 증병(병사의 수를 늘림)을 해주지 않은 것이 조정에 탄로날까 봐 두려웠다. 꾀를 내 경흥 부사 이경록과 조산보 만호 순신이 패전했다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그리고 순신을 감옥에 가뒀다. 함경도 병마사 이일은 형구形具를 관청 뜰에 벌여놓고 모진 형벌을 가해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다.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평소 이순신을 흠모하던 군관 선거이가 술을 내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술을 드시고 취하면 혹독한 형벌에도 고통이 덜하실 겁니다.” 순신이 애매하게 죽음을 당할 걸 애석하게 여긴 그에게 순신은 정색하며 “삶과 죽음에는 천명이 있는 법이니 이유 없이 죽지 않을 것인데, 술을 먹어 대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했다. 

큰 지도자의 옆엔 ‘직언’을 하는 측근들이 있다. 작고 얄팍한 지도자는 반대다. 그 옆에 포진한 측근들은 세상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차단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목소리만 전달한다. 그 때문인지 ‘문고리’ 측근들에게 의존한 권력자의 말로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이순신 역시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지금 세상은 어떤가. 이순신 같은 진짜 리더가 피해를 입고 있진 않은가.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