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㉔
이순신, 아군 지쳤을 때
싸우지 않고 적 물리쳐
역발상 통해 경쟁자 제압

“가장 효율적인 수비는 공격하는 것이다.” 이기고 싶다면 때론 ‘역발상’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같은 전략이 필요한 건 비단 운동경기만이 아니다. 경영자도, 상인도, 군인도 ‘역발상’을 통해 경쟁자나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순신이 ‘전투를 하지 않고도 이겼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편에선 순신의 통찰력을 옛 기록 그대로 느껴보자.

경영이든 전투든 승리하고 싶다면 다양한 전략을 써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경영이든 전투든 승리하고 싶다면 다양한 전략을 써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천해전에서 총상을 입은 이순신에게 휘하 장수들이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이를 마다하고 부하들과 함께 술을 나누며 전승을 축하했다. 이튿날인 임진년 6월 2일 오전 8시께, 사방으로 보냈던 척후선들이 돌아와 당포에 20여척의 왜군 전함이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는 왜적이 이미 육지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순신의 입에서 바로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함대는 연안을 따라 조심스럽게 당포를 향해 접근했고, 몇척의 판옥선은 경로를 따라 곳곳에 매복 배치됐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철저한 계산 아래 이뤄진 조치였다.

오전 10시께 조선 함대가 당포에 이르자 대형 군선 9척과 중선ㆍ소선 12척, 모두 21척이 눈에 들어왔다. 선창에서는 300명 정도의 왜군이 노략질을 하고 있었고 적의 대장선인 층루선(누각을 설치한 안택선)의 높은 누각에는 대장인 듯한 인물이 부채질을 하며 여유만만하게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시작은 거북선이었다. 2척이 전속력으로 적진을 향해 들어가자 왜군은 조총으로 맹렬한 사격을 퍼부으며 대응했다. 끄떡없는 기괴한 함선에 적들이 흠칫했다. 그 순간, 거북선은 층루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쿵’ 소리에 이어 ‘쾅’하며 거북선에서 날아온 각종 포탄으로 적의 대장선은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거북선의 뒤를 이어 조선 수군의 판옥선들이 일제히 돌입, 총통ㆍ화전ㆍ장편전을 쏘아댔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이 적의 탄환을 무릅쓰고 대장선 밑으로 달려들어 활을 쏘아 적장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적선에 뛰어올라 넘어진 적장의 머리를 베고 그를 구하려던 부하들의 머리도 베었다. 이순신은 ‘충무전서 당포전승 장계’에 이렇게 썼다. “… 거북선이 층루선 아래를 파고들었다. 거북선 입으로는 현자 철환을, 천자ㆍ지자총통으로는 대장군전을 방사해 배를 당파했다….” 

당포해전에서 왜군은 자신들의 영주(다이묘)인 총대장이 죽자 우왕좌왕하며 모두 육지로 도망갔다. 전라좌수영 우후 이몽구가 탈취한 적의 층루선에서 금부채 하나를 발견했다. 부채 오른편에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는 글자가, 한가운데엔 ‘육월팔일수길六月八日秀吉’,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琉球守殿’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우시는 왜국의 수길이 풍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쓰던 다이묘 시절의 성씨다. 수길이 자시의 밑에서 유구琉球태수를 지내던 구정龜井씨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추정됐다. 적의 대장 이름이 유구태수인 ‘구정자구龜井茲矩(가메이 고레노리)’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가메이 고레노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는 설이 있다. 이때 죽은 사람은 가메이 고레노리가 아니라, 구루시마 미치유키(구루시마 미치후사의 형)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 있다.

그렇다면 두 인물이 함께 출정해 미치유키는 목숨을 잃고, 고레노리는 부채를 잃은 셈이 된다. 하지만 미치유키는 이번 당포해전이 아닌, 이순신의 2차 출정 네번째 전투인 율포해전에서 패배하자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당포해전에서 도주한 왜적 패잔병을 추격해 소탕하려 할 때였다. 아군 탐망선에서 적의 대선 20여척이 당포를 향하여 온다는 보고를 올렸다. 순신은 추격 작전을 접고 휘하 장수들을 불러 하달했다.

“우리 군사가 잇따른 승전으로 사기가 충천하나 피곤하지 않을 수 없소. 이런 상황에서 적의 새 부대와 야전夜戰을 하기 곤란하니 싸우지 아니하고 적을 물리치는 계책을 써야 하오. 가장 좋은 방법은 당포 내에 있는 적선을 끌어내 포구 밖에 세우고 불을 놓는 것이오. 그러면 새로 오는 적의 함대가 기운이 빠져 감히 싸우지 못하고 도피할 것이오”.

순신은 말을 이었다. “당포는 너무 협소해 싸우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산 위에 도망가 숨은 적병이 많소. 바다에 새로 오는 적선과 접전하면 저들이 가세할 가능성이 있으니, 우리는 큰 바다로 나가서 좋은 진지를 잡아 싸울 준비를 해야 하오.” 순신의 명령에 아군은 적의 층루선 2척과 대선 몇척을 포구로 끌어내어 불을 놓았다. 

순신은 함대를 몰고 탐망선이 보고한 적 함대를 찾기 위해 당포를 벗어나 넓은 바다로 진출했는데 5리가량 거리에서 적의 함대가 아군 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가오던 적의 함대는 당포 포구 밖에서 같은 편으로 보이는 배들이 불에 타는 모양을 보고 방향을 돌려 개도(경남 통영시 산양읍의 섬 추도) 쪽으로 달아났다.

휘하 장수들이 끝까지 따라가 적을 섬멸하기를 원했지만 순신은 그들을 말렸다. 날이 이미 저물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 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당포 내항의 파도가 잔잔한 곳에 들어와 밤을 지내기로 했으나 어쩐지 당포는 안심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행선을 재촉해 이동거리가 꽤나 되는 남해도 위쪽 진주 지방 창신도 앞바다에 정박했다. 다음날인 6월 3일 새벽에 배를 띄워 추도(경남 통영시 산양읍의 섬) 근방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색했지만 전날 밤 도망친 적선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순신의 함대는 이날 밤 고등포(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신면 제동리)에서 쉬고 6월 4일 이른 아침까지 적선의 유무를 정찰했다. 그래도 안 보였다. 오후엔 당포 앞바다로 진출했다. 당포 근처에 살고 있는 토병土兵 강탁이란 인물이 “왜군 함선이 거제도를 향해 도망쳤다”는 소식을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해가 질 무렵, 서쪽 바다 먼 곳에서 상당히 많은 숫자의 병선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적선을 찾았나 싶었는데 시력 좋은 누군가가 “판옥선이다!”라며 소리를 쳤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거느린 판옥선 25척이 중소선 50여척을 이끌고 오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조우한 조선 수군들 사이에서 사투리가 터져 나왔다. “오메, 썩을 놈들, 뭣 땀시 이제 오는겨?” “아따, 그 뭐시기냐, 거시기 하느라 늦었부렀지~잉.” 

순신은 이억기의 손을 잡으며 “영감, 먼 길에 노고는 어떠하오”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이억기는 “함선 준비가 바빠서 길이 늦었습니다”라며 늦게 합류한 까닭을 설명했다. 

이순신은 ‘꾀’가 많은 장수이기도 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꾀’가 많은 장수이기도 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32세 젊은 나이의 이억기는 자신보다 16세 많은 순신을 마음으로 깊이 존경했다. 왜군이 조선을 기습하자 조정의 거의 모든 고위 공직자들이 싸우기도 전에 도망간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의 열번째 아들 덕천군의 후손 심주군沁州君의 아들로, 이를테면 선조의 종친이다. 

종친의 입장에서 유비무환의 충의로운 열정, 사심 없는 애국적 열정,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의 열정으로 과감하게 출병해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강하다는 왜군은 순신의 연승 이후 전라도에 발을 붙이지 못했고, 충청도 이북 바다도 안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순신의 함선 23척과 이억기의 함선 25척, 그리고 원균의 함선 3척 등 판옥대맹선 50여척의 삼도연합함대가 드디어 출발선에 섰다. 그리고 당포 앞바다를 떠나 착량(경남 통영대교 밑을 지나는 물목) 포구에 도착,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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