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다우트❾
자신들 사악한 욕망 채우느라
독재권력은 보수로 사람 현혹
사회파괴 세력은 진보 깃발
보수·진보 본래 가치와 달라

영화의 두 주인공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플린 신부가 시각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대비되는 부분은 웃음이다. 엄(격)ㆍ근(엄)ㆍ진(지)의 화신과도 같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얼굴에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파안대소는 고사하고 미소나 하다못해 ‘썩소’조차 비치지 않는다.

보수든 진보든 가치가 사라진 채 이름만 남은 듯하다.[사진=뉴시스]
보수든 진보든 가치가 사라진 채 이름만 남은 듯하다.[사진=뉴시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항상 긴장하고 항상 엄숙하며 항상 못마땅한 표정이다. 반면 플린 신부의 얼굴은 언제라도 웃을 준비가 돼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엄숙하고 경건한 강론을 하면서도 표정이나 말투가 그다지 엄ㆍ근ㆍ진하지 않다. 학생들에게도 항상 웃고, 동료 신부들과의 식사 시간에는 시시한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리느라 말을 잇지 못할 정도가 되기도 한다.

문득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풀어낸 그의 유일한 소설 「장미의 이름」이 겹친다. 이 소설에서도 수도원에서의 ‘웃음’이 문제가 된다. 수도원장 호르헤 신부 앞에서 수도사가 웃는다는 건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웃음’은 인간을 원숭이로 만들어버린다고 치를 떤다. 

결국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을 금서로 봉인한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 책 모든 책장에 독을 묻혀 그 책을 몰래 읽은 수도사들이 모두 죽어나간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도 아무 때나 실실거리고 돌아다니는 플린 신부를 할 수만 있다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성직자의 ‘웃음’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수도사나 신부, 수녀가 웃어서는 안 된다는 성경 말씀도 없고, 교회 규정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친다. “웃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없었지만, 웃으라는 말씀도 없었다. 또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도 없으며, 역사상 모든 성화聖畵를 살펴도 웃는 예수님의 모습은 없다.” 참으로 놀라운 백전백승의 논리다. 

예수님이 ‘달달함’이나 ‘편리함’을 죄악시하지 않았음에도 자기 멋대로 ‘설탕’과 ‘볼펜’ 사용이 예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규정한다. 그렇게 예수님의 ‘브랜드’를 참칭僭稱해 자신의 왜곡된 생각이 옳다는 근거로 동원한다. 관객들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논리에 황당해하지만, 과연 알로이시우스 수녀만이 그런 걸까. 

프랑스 혁명 이후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향한 혼란이 계속되던 1882년 파리에 모인 급진세력들이 ‘파리 코뮌(Paris Commune)’을 결성하고 자신들의 온갖 수상쩍은 주의나 주장에 모두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의 ‘브랜드’를 붙인다. 

마르크스가 한 적이 없는 말들이 마르크스의 말로 둔갑해 돌아다닌다. 이를 지켜보던 마르크스가 어지간히 기가 찼던 모양이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나는 분명 마르크스다. 그리고 나는 절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고 그는 혀를 찼다.

모두들 좋은 이름을 참칭해 자신들의 사악한 욕망에 분칠을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모두들 좋은 이름을 참칭해 자신들의 사악한 욕망에 분칠을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십자군 전쟁과 서구 제국들의 식민지 정복 시절에는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정상배들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야만스러운 살육과 악행을 저질렀다. 이들 모두 십자가를 앞세우고 예수를 들먹이지만, 정작 예수님이 자신의 무덤을 지키고 복음 전파를 위해 ‘그런 짓’을 하라고 하신 적은 당연히 없다.

모두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예수를 팔고 다닌다. 이 꼴을 본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예수(Christ)를 정말 사랑하지만 크리스천(Christian)을 사랑할 수는 없다”며 ‘예수팔이’ 크리스천들의 뼈를 때렸다. 


모두들 좋은 이름을 참칭해 자신들의 사악한 욕망에 분칠을 한다. 많은 부패한 독재권력은 ‘보수’의 브랜드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몇몇 시대착오적이고 사회파괴적인 세력들은 ‘진보’의 깃발을 힘차게 휘두른다. 그들 모두의 주의, 주장, 행태가 보수나 진보의 본래적 가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럽다. 진보라는 사람들끼리는 ‘수박’이니 ‘개딸’이니 하면서 치고받는데, 그것이 진보의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 투쟁인지는 알 길이 없다.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참칭 보수’라고 삿대질을 하니 조만간 ‘진박 감별사’와 같은 ‘보수 감별사’도 필요할지 모르겠다. 보수든 진보든 그 공허한 이름만 남고 이름이 담고 있던 내용과 가치들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보수와 진보 모두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보수와 진보 모두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12세기 프랑스 클루니(Cluny) 수도원의 수도사 버나드(Bernard)는 본래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 로마 교황청에 절망해 ‘경멸스러운 세상(De Contemptu Mundi)’이라는 시를 남긴다. “Stat Roma pristina nomine nonima nuda tenemus: 고대 로마의 이름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로마는 공허한 그 이름뿐이다.”

이 구절에서 로마라는 글자 자리에 보수를 집어넣든 진보를 집어넣든 마찬가지다. 보수나 진보라는 이름은 아직 남아있지만, 그 본질은 형해화되고 공허한 이름만 남아 허공을 떠도는 듯하다.


점점 많은 사람이 간디가 “그리스도는 사랑하지만 크리스천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한 것처럼 ‘보수는 사랑하지만 보수정당을 사랑할 수는 없다’ 혹은 ‘진보는 사랑하지만 진보정당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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