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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 완전히 다른 말
사실은 변하지 않고 고정적
진실은 보이지 않는 영역
그래서 진실은 왜곡 쉬워

중학교 2학년짜리 흑인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를 두고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플린 신부는 거칠게 충돌한다. 드러난 사실(fact)은 간단하다. 수업 중에 플린 신부의 호출을 받아 사제관에서 플린 신부를 ‘독대’하고 온 학생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나고, 학생이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그럼 사실이 곧 진실일까.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진실은 달라진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진실은 달라진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플린 신부는 육식, 포도주, 담배를 즐긴다. 플린 신부가 사제실에서 남학생과 독대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기호嗜好에 관한 사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진실(truth)’이 달라진다. 플린 신부를 학생들을 아끼고, 그저 유쾌하고 호탕한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실들은 반대로 플린 신부의 성향을 탐욕적이고 쾌락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서 해석하면 플린 신부가 ‘아동 성추행’을 했으리라고 추정할 수도 있고 그것이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겐 ‘진실’이 된다.

사실과 진실이라는 말은 비슷한 말 같지만, 실은 정반대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은 변하지 않고 고정적이지만, 진실은 유동적이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만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이다. 진실이란 존재하는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은 사람마다 주관적이어서 ‘사실’은 하나이지만 진실은 여러가지로 나타나 충돌하기도 한다. 

유리잔에 물 10mL가 담겨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혹은 필요에 따라 10mL의 물은 너무 많을 수도, 너무 적을 수도 있는 게 진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건 사실이지만 그가 부활했다는 걸 믿거나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진실이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었다’는 게 진실이다. 

당연히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진실 사이에서 충돌한다. 여기에서부터 진실에 힘의 관계와 권력관계가 개입된다. 니체(Nietzsche)는 ‘진실 의지(will to truth)’를 ‘권력 의지(will to power)’와 함께 묶여 있다고 봤다. 자신의 생각을 ‘진실’로 만들면 그것이 곧 남들을 지배할 권력의 원천이 된다.

세상에 ‘빼도 박도 못하게’ 밝혀진 확고한 사실이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나머지 부분들은 ‘진실 공방’의 영역이다. 심지어 한국전쟁이라는 사실을 두고도 여전히 그 전쟁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다.

밝혀진 사실을 자신의 관점과 필요에 따라 특정한 진실로 바꾸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곧 권력이 된다. 반대로 권력이 있으면 어떠한 사실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해석해서 진실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권력은 재생산된다. 

칼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단재 신채호는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인류의 역사는 사실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특정한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한 ‘진실 투쟁(truth struggle)’이나 다름없다. 모든 사람이 예수의 부활이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 수 있으면 세상을 지배할 권력을 얻는다. 중세 교황청의 무지막지한 권력이 그 진실에서 나왔다.


새로운 교구에 주임 신부로 갓 부임한 플린 신부는 ‘자기 편’이 없다. 반면에 오랫동안 교구 수녀원장이자 교구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봉직한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겐 자신의 해석을 ‘진실’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 있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달리 갓 부임한 플린 신부에겐 ‘자기 편’이 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달리 갓 부임한 플린 신부에겐 ‘자기 편’이 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렇게 수업시간에 따로 사제관으로 불러내 독대한 중학교 2학년짜리 흑인 학생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사실은 수녀원과 교구 학교의 권력을 쥐고 있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에 의해 주임신부와 학생 사이의 동성애 행각으로 해석되고 그것이 진실이 된다. ‘진실 투쟁’에서 패한 플린 신부는 교구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권력투쟁에서의 패배이기도 하다.

언젠가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어떤 연예인이 ‘술을 마시고 운전한 건 사실이지만, 음주운전을 한 건 아니다’는 신묘한 논법을 구사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 있다. 이 논법에서 술을 마시고 운전한 것은 사실이고, 음주운전을 안 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이 불굴의 논리에 너무 익숙해져 간다. 뇌물공여자와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돈은 받지 않았다고 하고, 돈은 받았지만 대가성은 없었다고 한다. 권력의지가 개입하면 드러난 사실은 모두 무의미해지고, 사실과 부합하기 어려운 것들이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권력이 없으면 거짓으로 결론 내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흉흉한 가운데 리투아니아 나토 정상회담에 참석한 대통령의 부인이 그 엄중하고 바쁜 일정 중에 난데없이 수행원과 경호원들을 몰고 현지 명품점을 방문했다고 시끄럽다. 

권력의지가 개입하면 사실과 부합하기 어려운 것들이 진실로 받아들여진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권력의지가 개입하면 사실과 부합하기 어려운 것들이 진실로 받아들여진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대통령실은 ‘명품점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쇼핑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한다. 명품점에 갔다는 그 사실의 진실을 살펴보니 문제가 없다는 설명인가 보다. 진실에 문제가 없으니 명품점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실과 진실을 놓고 벌이는 민망한 ‘진실 투쟁’을 지켜봐야 하는 고역은 국민들 몫이다. 국민들은 언제까지 다른 ‘진실’을 두고 갈라져 서로 삿대질하는 모습을 봐야 할까.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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