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⑥

북방 오랑캐는 조선과 중국의 우환거리였다. 이들이 침범하면 마을을 분탕질하고 부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북방에 편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당시 함경북병사 김우서金禹瑞, 온성穩城부사 신립申砬, 경원慶源부사 김수金燧, 부령富寧부사 김의현金義賢 등은 다 조정에서 선발한 명장이라고 하는 인물들이었지만 이들을 섬멸하지 못했다.

 

▲ 명장 신립조차 힘겨워하는 오랑캐를 섬멸하라는 명命이 순신에게 떨어졌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어느날, 전라좌수사 성박成鑮은 발포진 객사에 늙은 오동나무 한그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거문고 재료로 사용하고자 군관을 보내 베어 오라고 명했다. 성박은 음률에 취미가 있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순신은 이런 논리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관청 객사의 나무는 관가의 소유물이다. 또한 심어서 배양한 지 수십년이거늘 하루아침에 베어 국용에 쓰지 않고 사적인 물품을 만들려 함은 불가하다.”

 

오동나무를 베길 포기한 군관은 성박에게 돌아가 순신의 말을 보고하였다. 성박은 대노하였지만 순신의 정대함을 꺼려 그 오동나무는 취하지 못하였다. 이용이 성박의 뒤를 이어 좌수사로 내임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순신이 상관에게 아부하지 아니함을 미워한 이용은 트집을 잡아 벌을 주려 하였다. 관하의 다섯 진에 불의의 검열을 하였더니 다른 네 진에는 군사의 누락이 과다하여 수십명씩이나 되었지만 순신의 발포진은 본래부터 군령이 엄숙해 불참한 군사가 세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용은 다른 네 진의 문제는 불문에 부치고 유독 순신의 진에만 그 누락을 지적하여 군정이 해이하다는 죄로 조정에 장계를 보냈다. 이용의 용렬한 심정을 짐작한 순신은 신속히 사람을 시켜 다른 진의 누락된 군사와 그 성명을 기록한 원본서류와 증빙서까지 구해 이용이 조정을 속이는 죄를 대질 폭로하려는 준비를 마쳤다.

이용의 군관이 이 소식을 듣고 이용에게 “큰일 났습니다”고 이순신의 계획을 고하되 “이순신이 다른 네 진의 누락된 군사의 성명 원본까지 가졌은즉 만일에 이것이 조정에 발각된다면 후회가 적지 않을까 합니다” 하였다. 이용이 크게 놀라 급족急足을 파송해 장계를 찾아오도록 하고, 순신에게 화해하기를 구하였다. 그 뒤에 전라감사와 좌수사가 모여 관하 여러 진의 치적을 평가할 때 이순신의 정대함을 미워하여 기어코 가장 낮은 점수를 주고자 했다.

 

▲ 순신의 강직함은 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됐다. [사진=더스쿠프 그래픽]

이때 전라도사인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분연히 인정하지 못하여 이렇게 항언했다. “적을 막고 군사를 다스리는 성적이 전라도에서 이순신이 으뜸이거늘 차라리 열진의 변장들을 다 하등에 둘지언정 이순신을 폄하함은 불가하오.” 그 언사가 공정하고 엄숙하므로 감사와 좌수사가 무안하여 중지하였다. 순신이 이 소문을 듣고 세상살이의 험난함을 탄식하고 시를 읊어 회포를 나타냈다.

 

하지만 순신은 결국 파직을 당하고 만다. 1581년 1월 서울에서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발포진에 내려와 군기軍器를 조사하였는데 순신이 수리하고 새로 만든 군기가 극히 완비함에도 군기를 정비하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아 파직한 것이었다. 이는 순신의 굽히지 않는 성격을 미워한 병조정랑 서익이 군기경차관에게 부탁하여 원한을 갚은 거였다.

[※ 참고: 서익은 문장에 능하고 용력도 있어 그 당시에 문무겸전이라 하여 서기徐起, 송익필宋翼弼, 최경회崔慶會, 이억기李億祺,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한낱 참군 벼슬을 사사로이 천거하려 하다가 정대한 이순신에게 논책을 당하고 억압되어 원망을 품고 이렇듯 원한을 갚으니 어찌 군자라 하리오. 현명한 사람을 시기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남에게 몰래 부탁하여 암암리에 사람을 다치게 하고 국가의 공법을 스스로 범하니 간특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파직됐던 이순신은 1581년 4월에 도로 임명되어 다시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이는 그 무죄함을 조정에서 알고 군기경차관을 반좌율(무고 또는 위증으로 남을 죄에 빠지게 했을 경우 그와 동일한 형벌을 받게 하는 법)로 파직했기 때문이었다.

순신의 용맹함 선보일 기회 다가와

순신의 전통箭筒(나라에 길흉이 있을 때에 왕에게 바치는 보고문을 넣던 통)은 명인의 작품으로 용과 봉을 조각한 것인데, 상당한 보물이었다. 당시 우의정 유전柳塡은 고대의 유물인 골동품을 좋아했다. 그 전통이 순신에게 있음을 알고 훈련원에서 활쏘기 할 때에 유전이 찾아와 순신을 보고 청했다. “그대의 전통을 내가 빌리려 하노니 그대는 허락하겠는가.” 순신이 말했다.

“일개 전통은 드리기 어렵지 않습니다만 만일에 이 전통을 주고받고 하였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세인들이 대감의 받으심과 소인의 드림을 어떠하다 하오리까. 반드시 불공부정하다고 할 것이니 일개 전통에 인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전이 그 말이 정대함을 깨닫고 도리어 무안하여 사과하되 “그대의 말이 당연하다” 하고 그냥 돌아갔다. 1583년 7월에 이용이 함경남병사로 승직되어 이순신을 군관으로 정하여 동행하였다. 이는 순신의 위인을 알지 못하고 심히 박대한 걸 후회한 이용이 순신을 참모로 정하고 다시 교제하는 게 영광이겠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실제로 이용은 순신을 지극히 우대하며 대소 군무를 모두 상의하여 정의가 날로 더하였다.

 

▲ [더스쿠프 그래픽]

이 무렵, 지금의 길림성과 연해주 지방에 번호藩胡라는 오랑캐가 있었다. 유목과 침략이 본업이고, 농작이 부업이었다. 그중에도 가장 강한 부락의 추장은 니탕개尼蕩介, 울지내鬱只乃, 율보리栗甫里의 셋이요 그밖에 여러 추장이 있었다. 세 추장은 힘이 대단하고 심성이 잔혹하기로 유명하였다. 휘하의 장졸도 수천 혹은 수만여명씩이나 있었다. 이들은 조선과 중국의 우환거리였다. 이들이 함께 침범하면 마을을 분탕질하고 부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북방에 편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당시 함경북병사 김우서金禹瑞, 온성穩城부사 신립申砬, 경원慶源부사 김수金燧, 부령富寧부사 김의현金義賢 등은 다 조정에서 선발한 명장이라고 하는 인물들이었다. 적의 침략을 따라 동서로 대응하면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지만 끝내 섬멸하지는 못하여 변경 백성들은 날로 도탄중에 골몰하였다.

그중에도 신립은 무용이 남달라 선전하여 적들이 꺼리는 바가 된다지만, 그들을 평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적의 침략은 점점 심해졌다. 조정에서 이를 크게 근심하여 비록 작은 진의 변장이라도 북방 극지에는 인재를 택하여 임명하여 왔다. 이해 10월에 이순신으로 건원보(함경북도 경원군 동원면 신건동) 권관을 임명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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